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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의 제주살이

태풍 차바가 남기고 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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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처음 살게 된 집은 바닷가 4층 창 넓은 빌라였다. 그림 같은 풍경에 반해 이사를 하고 봄과 여름 제주를 만끽하며 소확행을 누릴 때만 해도 재난이라는 단어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을이 되었고 태풍 차바가 일본을 지나 북상하며 제주를 관통할 것이라는 뉴스가 일주일 전부터 방송되었고 마을회관 스피커에서는 “농작물 피해가 없게 하시고 노약자분들은 외출을 삼가시고예, 집 앞 하수구 정리도 해 줍서예”라며 하루 세 차례 이장님의 당부 말씀이 들렸다. 지금이 70년대도 아니고 또 제주는 비가 와도 워낙 물이 잘 빠지는 곳이니 별일이야 있을까 싶은 마음에 나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따라 피곤해서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쯤 제주를 관통한다는 차바는 먼바다에서부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소리를 커다란 스피커에 모아 볼륨을 최고치로 높여 틀어 놓은 듯 무서운 소리가 났다. 모래바람과 나뭇잎들이 엉켜 창문을 할퀴어 대는 소리까지 겹쳐져 마치 재난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은 깨버렸고 집은 괜찮은지 보기 위해 방문을 여는 그 순간 첨벙! 발이 잠겼다. 물이 너무 차가워 나는 소리를 질렀다. 거실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발코니와 통해져 있는 문 사이로 엄청난 양의 물이 꿀럭이며 넘쳐들어오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코드를 모두 뽑고 나서 거실 가운데 서 있는데 순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욕하고 싶었다.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시간들이 무참히 흘러내리고 있었고 경험치 못한 슬픔이 거실에 차오른 빗물과 함께 출렁거렸고, 나는 무너졌다. 그 순간 아이들이 방에서 나와 이게 무슨 일이냐! 소리를 질렀고 나는 아이들을 보니 눈물이 났다.

아이들은 엄마는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자기들이 정리하겠다고 하며 나를 진정시켰고 바가지와 세숫대야를 들고 발코니 쪽 문을 열고 물을 퍼서 버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이런 재난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기에 모든 걸 두고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날이 밝으면 비행기를 타고 어디로든 가서 돌아오지 말아야지’라 생각하면서 나는 버티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아이들이 쉬지 않고 물을 퍼서 버리고 수습한 덕분에 거실에 찼던 물은 바닥에 약간 흥건한 정도로만 남았고 나는 사용하지 않던 이불로 남은 물을 빨아들이고 장판을 들어내고 신문지를 깔았다. 그러는 동안 폭포처럼 쏟아지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고 시끌벅적한 유랑대가 떠나가듯 바람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며 곧 조용해졌다. 상황은 종료되고 전쟁은 끝이 났고 정신 차린 피난민들처럼 우리는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조금 후 밖을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부터 황금빛 손길이 태풍이 물러간 하늘을 달래듯 어루만지며 전진하고 있었고 주황색과 분홍색으로 물들인 하늘은 여태껏 본 하늘 중 가장 멋지고 눈부신 모습이었다. 바다도 잔잔해져 윤슬이 호박색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반짝였고 새 한 마리가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오르고 있었다. 햇살이 거실의 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조금씩 집안의 그림자를 지웠고 나는 재난영화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 순간, 태풍이 지나고 이렇게 멋진 하늘과 바다를 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리고 거실을 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 보였고 조금씩 치우면 금방 원상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우린 종종 차바와 같은 상황을 겪으며 살아간다. 집어 삼킬듯한 두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차가운 현실을 만날 수도, 갑자기 찾아든 불행으로 난장판이 된 집을 바라봐야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나가길 기다려 보는 것,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시간을 견디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밝은 날은 올 것이고 살면서 보지 못했던 아침 하늘이 아름다워 살 만한 날 들이였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는 날이 언젠가는 오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온 시간 동안 태풍 같은 날보다는 햇살 가득한 날이 훨씬 많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차바가 떠나며 남기고 간 긴 여운으로, 바람이 불어도 태풍이 지나가도 ‘금방 좋아지겠지!’라는 주문으로 제주를 떠나지 않고 매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글 _ 윤주리 (실비아) 6년 전 제주로 이주, 현재 초등 돌봄 교사로 재직하며 신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현재 대학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고 있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동시에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n SAM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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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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