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빨리 로마를 벗어나야 했다. 수개월 전에만 해도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 바오로가 솥을 구해 쌀을 씻어 맛있게 밥을 지었고, 이어 베드로가 맛있는 반찬을 곁들여 화려한 밥상을 차렸다. 로마의 많은 이들이 밥상 앞으로 모여들었고,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날로 세를 늘려나갔다.
하지만 호사(好事)는 거기까지였다. 다마(多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못마땅하게 여긴 로마 집정관이 베드로를 벼르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베드로는 로마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베드로가 서둘러 로마 성문 밖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베드로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스승 예수는 분명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눈앞에 예수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마를 탈출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자신은 지금 그 십자가를 피해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베드로는 즉각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그 길은 순교의 길이었다. 로마로 돌아간 베드로는 곧 집정관에게 잡혀 십자가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소천했다.
이 이야기는 180~190년경에 소아시아 또는 로마에서 편찬된 「베드로 행전」에 나와 있다. 「베드로 행전」은 성경 정경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 ‘위경’(Apocrypha)인데, 위경이라는 이유로 그 내용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힘들다. 초대교회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믿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쿼바디스 도미네’ 이야기는 교황 레오 1세 (Papa Leone I, 440~461년 재위)의 기록과, 13세기의 「황금전설」(Legenda aurea)이라는 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 베드로가 순교했다. 그렇다면, 그 유해는 어디에 모셔졌을까. 처음에는 로마의 한 지하 공동묘지에 모셔졌다. 이후 신자들이 매일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 기도하였는데, 서기 90년경에 무덤 위에 작은 경당 하나가 세워졌다. 말이 경당이지 서너 명이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박해가 본격화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베드로의 무덤이 파헤쳐지거나 훼손될 수 있었다. 이에 몇몇 신자들이 비밀리에 성인의 유해를 다른 공동묘지로 이장했다. 이 유해가 현재의 바티칸으로 옮겨진 것은 종교 자유의 시대를 맞으면서였다. 종교 자유를 허락한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I, 274~337)는 바티칸으로 옮긴 베드로 무덤 위에 제법 큰 성당을 세웠다. 이 공사는 318~322년 사이에 이뤄졌는데, 완공까지 40여년이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총 길이가 110m 정도였다고 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이 길이 69m, 폭 28m, 지붕 높이 23m, 종탑 높이 45m이니까, 당시 베드로 성당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500년 후 카롤루스 대제(Carolus, 742~814) 때 다시 성전을 건립했고, 다시 1000년 후인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바티칸이었을까. 베드로 사도의 유해를 애초의 로마 공동묘지에서 바티칸(원래 명칭은 ‘바티카누스’)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현재 베드로 대성당이 위치한 장소는 원래 로마의 전차경기장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를 콜로세움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로버트 테일러, 데보라 카 주연의 1955년 영화 「쿼바디스」 탓이 크다. 영화에서는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로마의 죄인 처형식은 대부분 전차 경기장에서 이뤄졌다. 바티칸, 바티카누스는 당시 사람들이 숭상하던 ‘출산의 신’ 이름이다. 즉, 바티칸이라는 이름은 ‘바티카누스 신(출산의 신)을 모신 신전이 있었던 장소’에서 유래한다. 2000년 전 로마 변두리였던 이곳에는 원래 본토 토박이들(에트루리아인)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로마 3대 황제 칼리귤라가 이곳을 재개발 지구로 지정,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출산의 신’(바티카누스) 신전을 허물고 황제 개인 전차 경기장을 건립했다. 그런데 로마 5대 황제 네로는 이곳을 죄인 처형 장소로 활용한다. 베드로도 바로 이곳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 베드로의 유해가 바티칸에 세워진 베드로 대성당에 모셔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00년 전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생생히 지켜본 ‘목격자’가 있었다. 지금도 바티칸 시국의 베드로 광장에 가면 그 목격자를 만날 수 있다. 광장 중앙에 솟아있는 높이 40m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그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서기 40년 칼리귤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와 전차 경기장 중앙에 세운 것인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베드로는 숨을 거두기 직전 이 오벨리스크를 보았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와 눈을 맞췄던 오베리스크를 나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쭈뼛거리며 다가가 만졌다. 주님께 질문을 드렸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
“… ….”
나는 즉각 응답하지 못했다. “저도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겠습니다. 당신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저도 걷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