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칠리아 해협 앞에 있는 람페두사 섬. 목숨을 걸고 소형 보트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온 난민 수십 명이 성 젤란드성당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난민들의 공동묘지’ 지중해에 수장되지 않고 용케 땅을 밟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난민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목이 빠져라 먹을 것을 기다렸다. 난민들의 공동묘지는 수많은 난민이 지중해를 건너다 빠져 죽는 현실을 애통해 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붙인 이름이다.
적십자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은 섬 일대에서 점심에 5000인분의 음식을 제공했다. 저녁에도 비슷한 양을 준비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난민들에게 먹을 것과 위생용품을 나눠주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느라 난민들 못지 않게 지쳐 보였다.
이틀간 난민 7000명 도착
섬 주민 프란체스카 마티나씨는 “며칠 전 소형 보트가 균형을 잃고 바위에 부딪치는 것을 목격하고 친구 곤잘로와 물에 뛰어들어 4명을 구조했다”며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람페두사)는 완전히 혼자이고, 유럽이 우리를 방치하는 현실에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이 섬에서 태어난 어부 빈센죠 리소씨는 “오로지 이곳에서만 전 세계의 침묵 속에서 펼쳐지는 비극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당국은 “9월 12, 13일 이틀간 난민 7000여 명이 섬에 도착했는데, 이는 기록적인 숫자”라고 밝혔다.
미국 가톨릭통신 OSV가 람페두사 현지에서 전한 상황은 10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2013년 7월, 이름도 생소한 이탈리아 남단의 작은 섬 람페두사를 방문해 이주난민들에 대한 관심을 인류 양심에 호소했다. 당시 람페두사는 교황이 베드로 사도 후계자 직무를 시작한 직후 선택한 첫 방문지라 국제 사회가 난민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다양한 지원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난민들이 끝없이 밀려들자 국제 사회 여론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한동안 난민 포용 정책을 펴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람페두사는 전쟁과 가난을 피해 유럽으로 향하는 아프리카와 중동 이주난민들에게 ‘유럽의 관문’으로 통한다. 분쟁국인 수단과 에티오피아, 가뭄과 기근으로 살길이 막막한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 난민이 다수를 이룬다. 폭력과 박해에서 탈출한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 난민들도 이 항로를 이용한다.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국적자도 더러 섞여 있다. 이탈리아 당국에 따르면 올해 12만 명 넘는 이주난민이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많은 인원이다.
난민들이 탄 소형 보트가 전복돼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지난 8월에도 튀니지에서 출발한 난민선이 전복돼 41명이 숨졌다. 지난 6월에는 그리스 남부 해안에서 난민 밀입국선이 전복돼 500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사고 발생 직후 반이민 정책을 펴는 그리스 정부가 엔진 고장으로 멈춰선 난민선을 방치해 최악의 인명 사고를 초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2014년부터 최근까지 지중해를 건너다 실종된 이주난민은 2만 8000명에 달한다.
난민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같은 현실을 “소리 없는 학살이자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라고 질타하며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 수 없는 귀청이 터질 듯한 그들의 울부짖음에”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했다.(7월 8일 서한 참조)
유럽 국가들은 문을 더 열라는 여론이 들끓으면 난민 수용의 피로와 인내심의 한계를 호소한다. 그럴 때마다 교황은 형제애를 강조하면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는 성구를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살해한 카인에게 하신 질문이다. 무관심 때문에 형제들에 대한 ‘소리 없는 학살’이 계속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이런 비극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게 교황의 생각이다.
한편, 교황은 9월 22일부터 23일까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지중해 회의에 참석해 이주난민에 대한 포용 정책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이주 현상을 주요 안건으로 열린 이 회의에서 교황은 “이주민 위기는 경고성 선동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협력적 대응을 요구하는 우리 시대의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또 바다에서 실종된 선원과 이주난민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익사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것은 인류의 의무이자 문명의 의무”라며 자국 이기주의에 매몰돼 의무를 망각한 ‘문명 대륙’ 유럽의 양심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