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요나 1,4)
인생에서는 계획했던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엉망이 되거나 폭삭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의 무지개를 꿈꾸었는데, 무지개는커녕 먹구름과 풍랑 속을 헤매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허무하게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삶에서 우리는 사업이든, 학업이든, 자녀의 양육과 기대에서도, 특히 사랑과 희망의 보금자리인 가정의 평화까지 깨지는 폭풍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절체절명의 수많은 풍랑 속을 헤매며 비통한 눈물 가운데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는 울부짖음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대명사인 욥의 탄식을 어느새 내가 웅얼거릴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 3,3.11)
이 같은 고난과 풍랑의 울부짖음을 평생 살아야 했던, 불쌍한 이들과 아픔을 공유하며 헌신하셨던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풍랑을 삶에서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 사랑으로 일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그토록 많은 결함과 불행이 존재하는 것일까? 영원한 존재는 사랑이며, 우리는 사랑받고 있고, 그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다른 나머지 것들은 ‘그래도 어쨌든’에 속하는 것일 뿐이지 않는가. 구름이 잔뜩 끼어 잔인한 폭풍으로 변할지라도 당신은 태양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아베 피에르, 「피에르 신부의 유언」, 웅진 지식하우스, 19~20쪽)
엄마 뱃속에서 나와 출발한 인생, 그 어떤 인생의 배들도 순풍에 돛단 듯이 평화롭게 항해하는 배들은 없습니다. 모든 배는 그 나름대로 인생의 항해에서 잔혹한 시련의 풍랑을 만나고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다가 슬픔을 딛고 다시 돛을 올려 목적지인 모항을 향하여 항해하는 것입니다. 완덕을 향한 신앙의 여정, 천상 예루살렘 그 영원한 모항을 향한 항해 또 한 그러합니다.
다마스쿠스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오로도 아무런 시련의 풍랑 없이 완덕을 향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험과 믿음의 혼돈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울부짖으며 이 같은 탄식의 말을 쏟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로마 7,24)
나아가 천상의 모든 성인 성녀들도 바오로 사도와 똑같이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번민하며 자신이 견뎌야 하는 풍랑을 헤쳐 나왔던 것입니다. 실로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찬 시련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끝없이 반복하며 인내와 희망의 삶을 살았던 분들이었기에 지금 천국 복락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풍랑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만, 헤쳐 이겨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자신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 산티아고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패배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왜, 우리 가정에 이런 고통을?’이라고 탄식하며 아픔을 토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어둔 밤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비로소 내게 가까이 올 때인 것입니다.
요나가 풍랑의 바다에 빠질 때, 자신의 삶이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명을 어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고,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이 풍랑의 바닷속에서 자신을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두려운 풍랑의 바닷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당신만의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말을 건네줍니다.
“고난의 인생에서 풍랑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그 손을 잡을 수 있는 엄청난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영동가톨릭사목센터 관장)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현재 춘천교구 영동가톨릭사목센터 관장 소임을 맡고 있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