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70이 넘도록 야크를 돌보다 늘 여기 앉아 강물을 바라보곤 하지요. 저 흰 산의 눈물이 나를 키워주었지요. 어머니의 눈물이, 죽은 아내의 눈물이, 내 가슴에 흘러 흘러 나를 살게 했지요.”
한 교계 신문에 연재되었던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의 포토 에세이 중 한 소절입니다. 초로(初老)를 지난듯한 야크 목동이 무릎을 끼고 앉아 언덕 아래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과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히말라야 혹은 몽골 어디쯤이겠지요. 에세이 제목은 ‘가슴 시린 풍경 하나’입니다.
특이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데, 글과 장면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선명하지 못한 사진 속 목동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피로에 지친 듯, 혹은 몽환에 빠진듯한 모습입니다. 그의 시선에 목동의 말이 오버랩되면서 살짝 전율이 일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목동의 심정이. 저 말의 의미가. 어쩌면 그의 삶이 온통 궁금했을지도 모릅니다. 목동은 왜 저 흰 산의 노래가, 어머니의 사랑이, 죽은 아내의 미소가 아니라 눈물이라고 했을까요. 시인은 왜 저 풍경을 가슴 시리다고 했을까요.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가지려고 애쓰며 삽니다. 또 다름을 찾고 달라지길 원하고, 그럼으로써 만족을 느낍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비교 우월’이지요. 작아지는 나를 견디지 못하고, 무시하는 상대를 그냥 넘기지 못합니다. 가끔은 스스로 자기소외에 빠져 속병을 앓습니다.
그렇게 아웅다웅 사는 우리에게 저 풍경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나이 70이 넘도록 야크를 돌보며 늘 한 곳에 앉아 흰 산의 눈물인 강물을 바라보며 살아온 목동의 삶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의 삶과 나의 삶은 무엇이 다를까요.
목동 곁에 앉아 흰 산의 눈물을 바라보는 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나를 키우고 살게 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여기 있게 만든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한때 천착했던 ‘자발적 가난’이란 말도 떠올려 봅니다.
세상에 고귀하지 않은 삶은, 아름답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글_전대섭 (전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가톨릭신문에서 편집국장, 취재부장,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바보’라는 뜻의 ‘여기치’(如己癡)를 모토로 삼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