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사라이의 속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그분의 딸이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을 믿지 않고, 고집을 피울 때도 많다.
10년 전 일만 해도 그렇다. 아내는 하느님께서 아이를 주시겠다는 말을 하셨는데도 믿지않았다. 오히려 “하느님 맙소사!”라고 말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12)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내 사라이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창세 17,19)
물론 나와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말씀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하신 말씀 중,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들 이사악을 예고하실 즈음 나와 아내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셨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창세 17,5)
“너의 아내는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창세 17,15 참조)
참으로 송구한 일이다. ‘아브라함’에서 ‘아브’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함’은 백성 혹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나를 민족의 아버지, 백성의 아버지로 세우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내의 새 이름 ‘사라’도 ‘여왕’이라는 뜻이니,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하느님에 의해 민족들의 아버지와 여왕이 되었다.
하느님은 더 나아가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7)고 약속하셨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이 있을까. 하느님은 또한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창세 17,8)고 하셨다.
실제로 하느님은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아비멜렉이 보낸 장수 피콜과 평화계약을 성사시켜 주시는 등(창세 21,22-34 참조) 당신의 약속을 하나하나 실현해 보이셨다. 그리고 이 모든 계약의 증표로 하느님은 ‘할례’를 요구하셨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17,11)
그래서 하느님 말씀대로 할례를 했다. 몸종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은 할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례는 우리 집안사람들만의 독특한 소속감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중에 자손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가더라도 할례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그 여부에 따라 나의 후손인지, 후손이 아닌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는 단순히 소속감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할례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었고, 순명이었다. 하느님의 명령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할례는 앞으로 하느님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이사악도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도록 했다.(창세 21,4 참조) 이사악은 벌써 성장해서 들판을 뛰어다닐 나이가 되었다. 이사악은 내 삶의 전부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이사악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이사악이 태어나기 직전, 몸종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했지만, 그들 또한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은 모두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창세 21,8-21 참조)
인간은 여정의 동물, 길 위의 동물(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이라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난했던 삶이다.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이곳으로 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혹독한 기근에 시달려야 했고, 낯선 이방인들과의 수많은 다툼도 거쳐야 했다.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 위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그 길 위에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사악은 그런 길 위의 여정 끝에 다가온 행복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의 일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