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체포될 때, 그리고 홀로 십자가에서 외롭게 죽어갈 때, 그곳에 제자들은 없었다. 심지어 한 젊은 제자는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달아나기도 했다.(마르 14,52 참조)
어떤 조직을 만들려면, 새로운 정신 운동을 일으키려면, 일반적으로 부자를 섭외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예수는 달랐다. 예수는 고통받는 이에게 다가갔고, 함께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더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예수가 어울린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마태 21,31), 이방인(마태 18,17), 죄인(마르 2,16-17) 등 평판 나쁜 사람들 일색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재산의 많고 적음은 제자선발 기준이 아니었다. 예수는 오히려 가난한 어부들을 제자로 선발했다. 1세기 티베리아에서 일어난 생계형 폭동은 당시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 ~ 100?)의 기록에 따르면 어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어부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그래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어부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한집에 살아야 했을 정도로 가난했다.(마르 1,29 참조) 위경인 「나자렛 사람의 복음」에서도 제베대오(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가 가난한 어부로 묘사된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어야 했을 정도로 극도로 굶주렸다.(마르 2,23-28;마태 12,1-8;루카 6,1-5 참조) 가난했으니 제대로된 교육을 받았을리 없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는 몇몇 제자의 경우, 일종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엿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베드로 또한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를 콕 집어서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특별히 말했는데도, 베드로는 뒤따라 걸어오는 ‘예수께서 총애하시는 제자’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예수께 이렇게 묻는다. “주님, 이 사람(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은요?” 그러자 짜증난 예수는 이런 요지로 말한다. “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고, 너나잘해라!”(요한 21,19-24 참조)
「열등감, 예수를 만나다」의 저자 한국교육상담연구원 원장 최원호 박사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나약하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과격한 행동을 일삼거나 교만함을 보였는데, 그럴수록 더 많은 열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교만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후, 마침내 성령을 통해 그 모든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면 심리적 긴장이 발생한다. 이때 심리적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허영과 자만심이 그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허영심과 열등감을 감추려고 겸손이란 모습으로 포장한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자기중심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고 이용하려 한다. 그 종착지는 ‘타인에 대한 배반’이다. 닭이 세 번 우는 동안 계속해서 이어진 베드로의 배반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성령 강림 후, 완전히 달라진다. 성령 안에서 배반에 대한 통회를 통해, 열등감을 극복하고 진정한 평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평화 속에서 선포하는 복음은 강렬했다.
예수는 열등감 갑(甲) 베드로를 제자로 삼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예수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12)
성령 강림 후, 마침내 열등감에서 해방된 베드로는 이제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한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