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요나 1,7)
13세기 페르시아의 수피 사아디(Sa'di)가 들려준 우화에 이런 지혜의 글이 있습니다. “딱 한 번 나는, 나의 불행한 운명을 원망하여 불평한 적이 있다. 당시 너무나도 가난하여 신발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아린 맨발로 투덜거리며 쿠파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때 거기서 나는 발 없는 사람을 보았다.”(사아디, 「사아디의 우화정원」 아침이슬, 21쪽)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살도록 미리부터 주어진 예정론은 아닙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든,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든, 도시에서, 혹은 시골에서, 또는 부잣집 금수저로 태어났든, 흙수저로 태어났든,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은 경우에는 계속 그 길을 걸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를 ‘부르심의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구약의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의 뜻이 아닌, ‘부름 받은 운명’을 이렇게 항변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예언자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아모스의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더구나 비탄과 탄식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부름 받은 자신의 운명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9)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불리움 받은 운명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아픔을 주더라도 끝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장한 죽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그 거룩한 운명을 힘들어하거나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더라도 끝내는 부르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장엄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2천 년 교회 역사의 수많은 성인들도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던 거룩한 분들이셨습니다. 사제직의 부름을 받은 이들도 저마다 소중한 부르심의 운명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한 번도 사제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운명처럼 부르심이 자신에게로 울려와 빨려가듯이 사제직에 몸담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저 또한 그러합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와 수도자가 많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겠다는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인생을 함부로 살며 방황하여 집안에 큰 근심거리로 전락하던 한없이 부족한 저를 그야말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고 운명처럼 이 길을 걷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실로 돌아보면 인생의 발자국마다 온통 은총이었습니다.
요나는 부르심의 운명을 거스르다가 끝내 하느님 진노의 풍랑을 만나게 되고, 제비뽑기에서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받는 가련한 처지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커다란 짐으로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느님 부르심의 운명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 놀라운 자유와 평화를 일찍이 깨달았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
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코린 9,19)
그래서 요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주님 부르심이 제게 울려왔을 때, 저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님 부르심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운명을 받아들일 때, 내게 참다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