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사악은 험난한 삶의 여정 끝에 다가온 행복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하느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를 데려가시겠다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그 어떤 형벌도 달게 받을 것이다. 하느님 명령이라면 마른 짚을 등에 지고 불에 뛰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들 이사악을 요구하셨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생 나를 이끄신 하느님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신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하느님은 분명 내가 모르는 계획이 있으실 것이다. 아침 일찍 아들을 불렀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아들은 환하게 웃으며 따라나섰다. 마치 소풍을 가듯 흥겨운 모습이었다. 아들은 번제물을 태울 장작을 등에 지고 함께 산에 올랐다. 잠시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아들이 환하고 흥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7) 마음이 찢어졌다. 하지만 슬픔을 드러낼 순 없었다. 만약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다. 나는 늙었다. 이사악이 그 빠른 발로 도망간다면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제사를 드릴 장소에 도착했다.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었다. 그런 후, 재빨리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번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칼을 빼 들었다. 아들이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럴수록 꽁꽁 묶인 밧줄은 아들을 더욱 옥죌 뿐이었다.
나는 의외로 차분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아들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한쪽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을 아들의 하얀 목에 가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다급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11)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창세 22,12)
천사가 조금만 늦었다면 이사악의 목이 날아갈 뻔했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긴 숨을 토해냈다. 아들을 죽이려던 섬뜩한 눈빛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아들 이사악도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숨을 ‘하악하악’ 내쉬고 있었다. 목에는 아직도 서늘한 칼날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양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브라함은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양은 아들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바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