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룻기는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 가족이 기근으로 인해,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이방인 며느리 룻만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기후 이주민’ 나오미가 이방인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정착하는 모습을 보면, 전쟁이나 기후 변화 등의 재난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이주민과 선주민 간의 사회통합은 오랫동안 꾸준히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현 정부가 240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의 향후 증가를 고려해 검토하는 이민청 설립과 730만 해외동포를 위해 설립한 해외동포청 또한 사회통합 조치의 일환이다.
올해 7월 프랑스는 외국인 소요 사태로 또다시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소요 사태를 일으킨 외국인들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이주배경 국민, 즉 프랑스 국민이다. 프랑스의 소요 사태는 2005년 프랑스 출장 때 내가 목격했던 ‘파리 차량 방화 사건’과도 매우 흡사해 보였다. 그 후 18년이 지나도록 프랑스는 사회통합에 있어서 전혀 진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같은 유럽 대륙 중 하나인 독일은 그동안 난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다. 그런데도 외국인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나라로 프랑스와 대조를 이룬다.
‘포도주의 나라 프랑스’가 단일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동화정책’을 편 것이 이주배경 국민의 가슴 속에 불만이 쌓이게 하였고, 그것이 외국인 소요 사태로 발전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맥주의 나라’ 독일은 다양성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소외와 배제를 최소화하는 ‘포용적 다문화정책’으로 난민들까지도 짧은 시간 내에 독일 국민으로 변화시켜 정착시키고 있다. 이는 구약성경 룻기에서 본토인 보아즈가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룻기 2,12)하며 이방인 룻을 포용하는 자세를 연상케 한다. 한편 ‘막걸리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다문화(여러 문화 공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주민들이 한국인으로 동화되기를 바라는 듯해서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이주민·난민은 ‘이슈’가 아니다. 기록을 경신해 가는 ‘숫자’ 게임도 아니고, 그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셨다. 보아즈가 룻에게 “내가 잘 들었다”(룻기 2,11)라며 룻의 기구한 운명을 들어서 잘 알고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룻이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저의 하느님이십니다”(룻기 1,16)라고 고백하는 두 마음을 잘 간직하고 곰곰이 새겨보면 좋겠다.
국제선이 정상화되면서 제주도에 다시 이주민·난민이 들어오고 있다. 큰 홍수와 산사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인도 북부 사람들과, 내전과 쿠데타로 정국이 혼란한 아프리카 동부의 부룬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부룬디에서 온 친구들은 비행기를 네 번씩이나 갈아타고 왔다고 한다. 처음으로 막 찾아온 사람들의 고단한 이야기를 듣자면 상담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 정신을 모토로 일하고 있는 나오미센터 직원들과 보아즈의 따뜻한 마음을 지닌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이 있기에 제주도의 사회통합이 룻의 이야기처럼 잘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희망도 가져본다.
김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