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알폰소(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고질병(痼疾病).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고질병은 1)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 2) ‘오래되어 바로잡기 어려운 나쁜 버릇’을 가리킨다. 질병으로서의 고질병은 주로 개인에게만 적용되지만, 나쁜 버릇이나 습관으로서의 고질병은 개인은 물론 집단이나 사회까지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술만 마시면 주정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됐다면, “저 친구는 술만 마시면 저래,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나쁜 버릇이나 습관으로서의 고질병은 다른 사람에게 옮기도 한다는 데 있다. 고질적인 도벽이 있는 부모를 보면서 성장한 자녀들은 도벽에 빠질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자녀들에 비해 크다. 입만 열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지만, 고질병은 어느 정도 전염성을 지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고질병의 전염성은 인간 마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5)라는 말씀처럼, 남이 잘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질투심, 남이 뭐라고 하든지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아집, 내 말은 다 옳고 다른 사람의 말은 틀렸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독선, 나와 관련되는 것이면 절대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심,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확실히 고질병에 빠지기 쉽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님비(NIMBY) 현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지역적 집단적 이기주의, 입으로는 민생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당리당략에 집착하는 정당들의 행태, 학교 폭력이나 교권 침해에서 드러나듯이 부와 권력을 등에 업고 약자를 괴롭히며 사리사욕을 챙기는 몰지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나 명예나 권력을 잡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출세지상주의….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 곧 고질병들이 아닌가 싶다.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에는 이런 고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그뿐 아니다. 고질병의 이런 측면들은 교회 안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교회 지위나 권위를 이용해 교회 직원이나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그 대표적이다. 사실 교회 안에서 권위주의라고 하면 성직자 권위주의를 생각하기 쉽지만, 성직자 권위주의 못지않게 평신도 권위주의 문제도 심각하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 여러 고질병의 근저에는 합리적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힘에 의한 폭력과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말은 폭력적 언어로 바뀌고 대화는 일방적인 주장이나 강요로 끝나 소통이 아닌 불통이 되고 만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올바른 대화법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소통을 위한 올바른 대화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가톨릭교회는 지난 2년간의 시노드 과정을 통해서 참다운 대화는 경청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경청은 단순히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다하여 상대방의 말투와 표정까지 헤아리며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다해 경청한다면, 상대방 또한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청이 상호 경청이 되고 이것이 또한 참다운 대화와 소통으로 이어지면, 우리 사회의 여러 고질병은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고질병을 치유하고 싶다면 경청에서 출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