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정착해 홀로 있으면서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사람이 떠올라왔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동안의 나 자신을 용서합니다, 주님.’
잘 모르겠지만 주님은 내게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왜 난데없이?’ 하는 의문이 이어졌다. 나는 그 존재를 거의 잊고?용서한 것이 아니라?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엎지르듯 흘러나온 기도는 며칠 동안의 내 묵상거리가 되었다.
가만히 내 마음을 살펴보았다. 상처가 내게 잔가시처럼 박혀있었다. 만일 마음이 아니라 내 육체에 그 가시가 꽂혀 있었다면 나는 서둘러 그것을 뺐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작은 상처라는 이유로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놓아두었고, 이제 침묵 중에 내 영혼이 내게 그것에 핀 라이트를 비추어 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가시라도 그것을 뽑을 때는 통증이 있다. 그것은 움직임, 역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으로 대입해보니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 기도 중에 그 잔가시들부터 뽑아내야 했다. 미워한다는 것, 그것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은 없다. 미워하는데 에너지가 드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사랑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이를 낳은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산후 우울증’이라는 하나의 병명으로 부른다. 미워하는 것은 병에 이르는 고통인 것이다. 마땅히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부모를 미워하는 것은 정신과의 단골 상담메뉴이다.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을은 내게 편안하고 휴식을 준다. 내 직장도 그렇다. 그러나 어느 날 다툼이 일고 내가 내 이웃을 미워하게 되면 나는 불편해진다. 불편한 것은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이런 마음이 많아지면 산만해지고 집중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다. “누구 좋으라고 용서해?”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손에 박힌 가시를 뽑는 것이 가시 좋으라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런데 용서란 무엇인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힌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다는 것이 뇌의 손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이럴 때 나는 송봉모 신부님의 책 「상처와 용서」를 생각한다. 그 책을 읽고 나는 마음에 새겼었다.
“인간으로서 저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최소한 ‘제 손으로는’ 그를 해치는 일을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용서조차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어쩌면 그래서 가끔 겸손이라고 불리는 것, 이것이 기도의 또 하나의 본질이 아니던가.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싶었기에 미움으로조차, 보복이라는 이름 혹은 정의라는 이름으로조차 내 입과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진정 하느님이 지으신 귀한 나를 사랑하는 길은 그와 무관한 사람이 되어 무심하고 평범하게 축복을 보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미워한다는 것, 그것은 털을 역결로 쓰다듬는 일 같아서 우리 강아지도 그건 아주 싫어한다. 그러니 하는 수없이 내 존재의 깃털을 순결 방향으로 쓰다듬는 수밖에….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