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 받은 후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한 동안 수녀원에 거주했다. 이름은 근사했던 ‘프랑스 정부장학금’으로는 파리의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뜻밖의 도움으로 어느 수녀회 본원에 저렴한 방 한 칸을 얻을 수 있었다. 도착한 이튿날이었다. 이른 아침, 라푼첼의 탑처럼 둥글고 가파른 층계를 내려가니 경당에 수녀님들이 모여 성무일도에 따라 아침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독서대 쪽에서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와서 고개 들어보니 은발에 체구가 조그만 수녀님이 성서를 낭독하고 계셨다. 그 공동체에서 가장 노래 잘 부르신다는 수녀님. 은퇴 전엔 성당 부속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치셨단다. 나이 먹어 이제 외국어를 잊어버렸다 하시면서도 유려한 영어로 내 논문 주제에 관해 물어보셨다.
그 후로도 종종 경당 뒤에 서서 아침기도를 듣곤 했다. 노래 선창하실 때 그 수녀님은 ‘새댁’ 같았다. 생일 저녁 식탁 차려두고 배우자를 기다리며, 설렘을 감추려 짐짓 새침해진. 왜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물 몇에 입회해 내내 학생을 가르쳤고 이젠 일흔을 넘긴 분께 말이다. 그러다 생각했다. 만일 우리 내면에도 얼굴이 있다면 저분은 새침한 얼굴로 신랑인 예수님을 마주하겠구나. 한편 그분과 단짝이던 수녀님은 기도할 때 개구쟁이 소년 같았다. 평소 명랑하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로 수도자가 전례 도중 꾸러기처럼 장난쳤을 리 없음에도 그랬다. 그래서 또 짐작했다. 저분은 막내둥이가 되어 ‘형아’인 주님을 만나겠구나. 그렇게 각자 기도의 얼굴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평소 쌀쌀맞게만 보였던 원장 수녀님에게선 손주 손에 과자 쥐여주는 외할머니의 푸근함이, 한 간호사 수녀님에게선 아기를 품에 안은 부모의 벅참이, 또 다른 수녀님에게선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녀의 애달픔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일찍 잠든 밤이었다. 목이 말라 설핏 깼다가 계단참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길래 복도로 나가 내려다보았다. 수녀님들이 층계를 총총 내려가고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 ‘너도 올래?’ 손짓했다. 서툰 불어로 어렴풋이 알아듣기로 다음날이 어떤 대축일이라 이를 기념하는 밤기도를 한다 했다. 단조로운 선율로 짜인 긴 기도를 듣다 한순간 전율이 일었다. 캄캄한 밤, 경당에 모여 하나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스물 몇 명은 제각기 새댁과 개구쟁이 소년과 외할머니와 젊은 엄마와 사춘기 여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난 어떤 기도의 얼굴을 갖길 소망할까.
영화 ‘원더풀 라이프’(고레에다 히로카즈, 1998)엔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늘로 향하는 길모퉁이 사진관에 머물며 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르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한 할머니는 유년 시절, 터울이 많이 나던 오빠가 새 옷 사준 기억을 택한다. 동네 유지의 딸이 입고 다니던 원피스가 마음에 들었던 오빠는 어느 날 도쿄 시내를 뒤져 같은 걸 사왔단다. 그 옷 입은 꼬맹이 동생을 자랑하고 싶어 “빨간 밥 사줄게” 구슬려 자신을 데리고 나갔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치킨라이스였지 싶다고. 경양식집 가서 그날 배운 빨간 구두 춤 쳐보라 하면 치킨라이스 먹고 싶은 마음에 또 그걸 하고, 그러면 오빠 친구들이 아이스크림 사준다며 데려가고 그랬다고. “그런 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그 옷 그대로 입고서. 먹을 것에 낚여 여기저기 따라다니고.” 이렇게 말하며 할머니는 감자꽃처럼 웃으셨다.
그러니까 바로 그 얼굴을 하고 싶은 거다, 나는. 꼬까옷 입고 치킨라이스 먹으며 좋아하는 누이동생의 얼굴. 그 얼굴로 나의 하느님을 마주하고 싶다. 점점 나이테를 더해가서 머지않아 앳됨의 마지막 흔적마저 내게서 지워질 테지만 걱정은 없다. 시간이 더 흘러 할머니가 되어도 오빠한테 동생은 항상 어린 누이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