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JSA에서 히로시마까지
2023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은 동북아시아에서 전쟁과 갈등의 역사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인 JSA와 일본 히로시마를 각기 순례하며,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다. 참가자들은 10월 25일부터 27일 오전까지 경기도 파주와 JSA 일대를 찾아 한반도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성찰했다. 이어 일본으로 건너간 순례자들은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일본 히로시마를 돌아보며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갈등을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붓글씨로 표현한 평화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는 ‘2023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을 개막하며 첫날인 10월 25일 민족화해센터 평화순례자 갤러리에서 ‘평화 선언’ 서예전을 개최했다. 의정부교구 사제들과 동북아평화를 지향하며 살아온 전·현직 정부 관료, 언론인, 학자 등 8명이 작품 24점을 선보였다. 종이와 먹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나눈 전시로, 작가들은 저마다의 평화를 붓글씨로 구현했다. 상생의 정신과 평화 정착은 불가분의 관계. 개막과 함께 선보인 평화의 붓글씨 작품들은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미국과 일본 주교들을 비롯한 국제 참가자들은 동양의 전통 예술에 더해진 평화 메시지를 관람하며 한반도평화포럼의 문을 열었다.
JSA성당에서 미사…평화순례의 시작
참가자들은 앞서 컨퍼런스 참석 후 10월 27일 판문점을 방문하고, 군종교구 JSA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다. 분단의 아픔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자, 평화를 위한 기도가 간절한 JSA성당에서의 미사는 다음날 일본으로 이어지는 평화 순례의 시작점이 됐다. 한ㆍ미ㆍ일 주교들과 참가자들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장벽 앞에서 평화를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강론에서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는 건 남북 간 이해충돌이나 대화 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문제를 자국의 이익에 이용하려는 주변 강대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간 한반도 역사를 통해 경험했다”고 했다. 이어 “철조망으로 된 장벽은 분열과 갈등과 적대감을 의미한다”면서 “한반도 평화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모든 나라가 해야 할 일은 적대감을 없애는 일”이라며 “평화를 이루는 과정에 발을 내딛고 손을 잡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이 세상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전쟁이 사라질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간구하자”고 당부했다.
원폭 돔에서 전쟁 없는 세상 기도
평화를 향한 참가자들의 순례는 일본 히로시마로 이어졌다. 히로시마 순례는 전쟁의 아픔을 공유하며 역사 문제에서 비롯한 각국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10월 27일 오후부터 이어진 히로시마 순례에는 한ㆍ미ㆍ일 주교 9명과 3국의 전문가, 사제, 수도자, 청년 등 40여 명이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전쟁의 참사, 그중에서도 핵 사용의 비극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히로시마에서 전쟁 없는 세상을 바라는 기도를 바쳤다.
참가자들은 이튿날인 10월 28일 오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아 핵폭탄으로 앙상한 형체만 남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원폭 돔)과 핵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조선인을 위로하고자 세워진 위령비를 돌아보며 전쟁의 비극과 핵무기의 위험성을 되새겼다.
순례에 함께하고자 미국에서 온 헤이든 스미스씨는 평화기념공원을 돌아본 뒤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며 “힘을 이용한 평화라는 말의 허구성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공간 다른 생각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역사 문제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대립을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순례자들과 별도로 관광을 위해 평화기념공원을 찾은 한 한국인 관광객은 공원 내 기념관과 위령비를 돌아보며 “수십만이 목숨을 잃었다는 비극에 슬픔이 들면서도 이들이 목숨을 잃은 원인이 스스로 일으킨 전쟁 때문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핵폭탄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슬픈 공간이면서, 조선인 위령비 등을 통해 모두에게 화해를 청하는 평화의 공간으로, 평화를 바라는 많은 이들이 찾는 공간”이라고 했다.
집단 기억 차이에서 생긴 오해와 갈등 확인
순례 참가자들은 이 같은 집단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와 갈등을 극복하는 자리에도 함께했다. 허승훈 리츠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이하 APU) 국제관계평화학 박사가 10월 28일 히로시마 세계평화기념성당에서 진행한 ‘갈등 해결 워크숍’에서다. 갈등 해결 워크숍은 먼저 설문을 통해 각자 지니고 있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에 대한 지식의 출처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성찰하고, 소그룹으로 나눠 서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허 박사는 “진실은 하나뿐이라는 오해를 지닌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구성된 ‘집단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각 국가와 국민들이 겪는 갈등 극복의 시작은 각자의 진실이 집단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미·일 주교 평화를 위한 반성과 화해 강조
순례에 함께한 미국, 일본 주교들은 한목소리로 평화를 위한 반성과 화해를 강조했다. 전 미국 주교회의 국제정의평화위원장 리처드 페이츠 주교는 10월 28일 히로시마 세계평화기념성당에서 봉헌한 미사에서 “과거 히로시마에서 발생한 비극은 핵폭탄이 다시는 사용돼서는 안 되며 핵폭탄 사용은 부도덕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면서 “핵폭탄을 사용하기로 한 미국 정부의 결정은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페이츠 주교는 이에 대해 사죄의 뜻을 전하며 진정한 화해를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전 나가사키대교구장 다카미 미츠야키 대주교는 이튿날 미사를 주례하며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과거 역사 과정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그 역사를 움직인 위정자와 군인, 국민의 책임을 생각하며 깊이 반성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비난하고 상대의 책임만을 추궁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노력해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히로시마)=장현민 기자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