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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악의 우울증?

[월간 꿈 CUM] 유랑 _ 이야기 구약성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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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이사악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603,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창세 22,12)

천사가 조금만 늦었다면 이사악의 목이 날아갈 뻔했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긴 숨을 토해냈다. 아들을 죽이려던 섬뜩한 눈빛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아들 이사악도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숨을 ‘하악하악’ 내쉬고 있었다. 목에는 아직도 서늘한 칼날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세계 어느 민족의 문학도 이렇게 인간과 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신이 만약 아브라함에게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라고 명령하고, 아브라함이 “예! 알겠습니다”라고 순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 이야기는 훗날 흔한 순교자 이야기들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아들을 요구했고, 아브라함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그것도 늘그막에 얻어 애지중지 키우던 그 아들을 죽이려 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극적 효과는 훗날 수많은 철학자 및 종교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유대교의 위대한 랍비 나흐마니데스는 인간 자유 의지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극찬했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이사악 봉헌을 둘러싼 신앙의 여러 문제에 대해 성찰한 연구서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윤리적 이상뿐 아니라 아들과도 결별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이 남는다. 성경은 오직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서만 서술할 뿐이다. 정작 제물이 되었던 당사자 이사악의 입장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사악의 심정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사악은 평생 동안 오늘날의 ‘명절 증후군’ 비슷한, 이른바 ‘제사 증후군’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제사 때 번제물로 바치는 양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자신이 양처럼 목이 잘린 채 제단에 올려지고, 불에 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던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가득 품은 채 성장했을 수도 있다. 부모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충격 때문에,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윤리성에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가. 하느님은 과연 살인을 원하는가.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 윤리와 배치되는가. 최고의 윤리 그 자체인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비윤리적인 것을 명령하는가.

이에 대해 대부분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 윤리 신학자들은 하느님 의지와 보편 윤리의 갈등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신앙의 절대성만 강조하는 일부 해석들을 경계하고 있다. 이사악이 제물로 선택된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가장 귀중한 소유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선물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물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에서 이사악이 자기 번제에 사용될 나무를 지고 걸어간 사실을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간 사건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희생(경배)의 완전한 목적, 즉 인간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그렇기에 마땅히 온 곳으로 되돌려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실제로 죽였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결국, 그 희생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이사악의 희생은 후세대를 위한 진정한 경배의 모델로 남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순명에 대한 보답으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선택과 약속이 단순히 유대 민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느님은 단지 아브라함 자손들만의 번성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만의 번성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7-18) 하느님은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다. 미국인, 유럽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에게도 복을 내리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약속은 훗날 우울증을 겪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사악에게도 계속 이어진다.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6,4)


글 _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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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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