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자전거를 즐기는데, 처음 1년은 힘으로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자전거는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은 10㎞도 가지 못한다. 굴러가는 바퀴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힘을 빼고 타면 100㎞도 거뜬히 갈 수 있다. 힘 빼야 제대로 탈 수 있다. 이 밖에 골프, 수영 등 대부분 스포츠에서 ‘힘 빼기’는 하수와 고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인류 역사 이래로 머리 똑똑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힘 빼기’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노자(老子, ?~?)는 ‘힘주지 않는 것이 진정 힘주는 것이다’(無爲의 爲)라고 했고,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는 ‘머리에 힘 빼는 것’(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 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힘 잔뜩 주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조금만 건드려도 파르르 한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에서 손해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로마 10,11-13 참조)
물론 살다 보면 위기 상황이 올 수 있다. 사업 실패, 퇴직, 건강 악화, 갑작스런 사고, 대학 입시, 취업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심한 마음 앓이를 할 수도 있다. 터무니없는 모함과 거짓말로 상처받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어떤 때는 이 모든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힘을 잔뜩 준다. 티베트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 힘 빼도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수고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신다. 그 유혹의 실체가 바로 “힘줘!”다. 나와 공동체를 붕괴시키기 위해 사탄은 ‘힘줘!’라는 달콤한 사탕을 내민다. 예수님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사탄이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을 때 “NO!”라고 말씀하셨다. 할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다.(루카 4,1-13 참조) 힘 확실히 빼셨다.
성경을 읽다보면 대부분 힘 빼라는 내용인데, 우리는 혹시 힘 잔뜩 들어간,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 성경을 붙잡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힘 빼도 된다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춥다. 자전거를 오랜만에 꺼냈다. 힘 빼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중랑천 힘 빼고 살아가기 물이 힘 빼고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물결이 차분하다. 따뜻해졌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