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29일 한·미·일 주교단과 학계, 종교계, 시민 단체들, 젊은 세대가 함께한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다녀왔다. 내게 맡겨진 일은 3국의 젊은이들과 주교단의 대담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었다. 가을에 고향을 찾기는 참 오랜만이다. 정겨웠지만 슬펐다. 위령 성월을 앞둔 거리엔 1년 전 이태원 참사의 기억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산업재해로 죽어간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모 천막들이 늘어서 있었다. 멀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수십 년 억압의 역사가 더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러 결국 전쟁으로 폭발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다.
나라 안팎, 전장과 일상을 가로지르는 그침 없는 고통의 파장 속에서 포럼 일정으로 휴전선 일대와 히로시마를 오가며, 나는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 서 있는 예언자 에제키엘의 환시를 떠올렸다. 이 폭력과 상실의 현장에서 과거와 미래, 국가와 국가, 세대와 세대 사이 다리 놓기를 하는 우리의 말과 몸짓이 ‘숨’을 향한 예언이 될 수 있을까.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에제 37,8)
젊은이들이 가진 평화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아픈 우리의 현실에 뿌리를 대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신자유주의 생존경쟁에 매진하며 취업과 경력을 고민해야 하는 자신들에게 한반도 평화는 어떤 의미인가 물었다. 힘에 의한 평화를 강변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가 동북아 긴장 완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궁금해했다. 이주민을 포함하는 국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는 한·일 가톨릭 교회가 혈육과 민족의 당위성을 뛰어넘어 한반도 평화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물었다.
한반도 긴장이 국내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안보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며 “잊혀진 전쟁”을 시의적절한 의제로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평화에 대한 교회 가르침이 본당과 신자들의 삶 안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 과연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비난과 책임회피가 아닌, 투명한 정보 공유와 절차가 평화의 필수 요소라며,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질문했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세상, 의견의 차이를 좁히기 힘든 세상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서도 평화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갈구했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에서, 주교단은 젊은이들과 함께 안타까워하며 관심과 대화, 공감과 인내심을 청했다. 일상에서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에 대한 회개가 필요하다며, 먼저 회개하고 기도하겠다고 했다.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이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고민을 던져준 자리였다. 갈 길은 멀지만, 그 대화가 가능하다고 느끼게 한 희망의 자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게는, 서로 묻고 경청하는 가운데 상호 이해를 도모하는 주교단과 젊은이들의 모습이 ‘평화의 성사(聖事)’로 느껴졌다. 명사이자 형용사이며, 이상이자 현실이며, 추상적 개념이자 구체적 행위이며, 목표이자 과정이며, 내용이자 방법인, 아스라하지만 꼭 이루어 내야 할 그 평화 말이다.(정진헌, ‘평화의 렌즈를 끼고 세기사적 전환을 모색하다’)
힘에 의한 평화는 없다. 힘으로 구한 안정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가 지구촌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살아야 하며, 또 모두가 함께 살고 싶게 하는 것이 평화다.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전쟁이 인간의 일이라면, 평화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마른 뼈에 힘줄과 살이 올라오며 숨이 붙는 것 같은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