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은 사회주의 계열 신문 ‘데일리 워커’ 특파원으로 중국 공산당 혁명을 생생하게 보도한 인물이다.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와도 가깝게 지내며 공산당의 승리를 목격한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파견됐다. 1950년 7월 16일부터 5주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전쟁을 취재한 위닝턴은 7월 말부터 8월 초 사이에 대전 ‘골령골’을 방문했는데, 참혹한 민간인 학살을 기록한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서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제목의 책자를 출간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1950년 6월 28일부터 20여 일간 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여 명까지 민간인이 학살당해 암매장된 비극의 현장이다. 위닝턴은 골령골에 6~12피트 너비에 6피트 깊이로 파인 구덩이가 6개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가장 큰 구덩이가 200야드였고, 2개는 100야드, 가장 작은 것은 30야드였다”고 설명했다. 골령골 인근 주민들의 증언으로 파악된 8곳의 구덩이를 합하면 그 길이가 1㎞에 이른다. 산내 골령골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골령골의 참상은 미국국립문서관리청(NARA)에 보관된 미군 문서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드 중령은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이란 제목의 문건을 작성해 1950년 9월 23일 미 육군 정보부에 보고했다. A-1 등급의 고급정보로 1999년에 이르러서야 기밀해제된 보고서에는 18장의 사진이 첨부돼 있으며, 다음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중략)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 벌어진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 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됐다.”
11월 9일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산내 골령골을 방문했다. 민족화해분과위원들과 이북에 고향을 둔 북향민(北鄕民)을 동반하는 수녀님들은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하며 위령기도를 바쳤다. “주님,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강주석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