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교시 강의가 있는 날. 커피를 사러 인문관 1층 편의점에 들렀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내내 울상을 하고 있던 주인은 다시 얼굴이 좀 환해졌지만, 학생들이 여전히 잘 나오지 않는다며 쓸쓸한 표정이다. 날이 추워 따뜻한 커피를 내리다가 학생들 얼굴이 어른거린다. 1교시 수업을 들으러 먼 길을 지하철 타고 졸며 시달리며 강의실에 와 앉아 있을 학생들. 바나나며 초코파이, 삶은 계란을 주섬주섬 담는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살짝 졸린 표정으로 앉아 있던 학생들 얼굴이 환해진다. “배고프지요?” “네….”우리 학생들은 기특하면서도 애잔한 구석이 있어서, 밥을 사준다 해도 늘 ‘괜찮아요’ 한다. 이번 주에 읽은 책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질문을 담은 책이다. 대개 한 학기 주제를 앞서 정하는데, 이번 학기는 장애인 문제와 환경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엔 ‘장애’라는 개념도, 단어도 없었다고, 장애는 문명이 효용성의 잣대를 내세워 만든 개념이라 말해주면 학생들 눈이 반짝인다. 인간을 도구화하면서 장애/비장애인 구분이 더 굳어졌다는 자각에 이르면, 학생들은 장애인 출근 투쟁으로 지하철이 늦어졌을 때 투덜댔던 일을 반성하며 ‘내가, 우리가, 이 사회가 무얼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대학에서 믿음과 가치, 지향과 이상을 이야기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시절이건만 말을 살짝 바꾸어서라도 자꾸 질문한다. ‘괜찮으냐’고, ‘이 세상,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냐고?’ 이런 질문을 할 때는 강의실 맨 앞자리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몇 년 전 다른 세상으로 간 제자를 늘 생각한다. 유난히 성정이 맑은 아이였는데 무지막지한 고립감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놓친 아이를 생각하면 지금 마주하는 아이들의 눈빛, 목소리가 모두 흔들흔들 맑은 물에 어리는 빛의 밤송이 같다.
아침 교실에서 만드는 그 잠깐의 시간은 함께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모색하는 공동의 시간이다. 돈이나 힘, 학벌, 권세 등 안전한 그들만의 리그에서 으쓱 마음 편해지고 허위의식 부풀리는 그런 공동이 아니라, 이 세계 수많은 다름을 향해 마음 열어가는 차원이 다른 어떤 지향이다. 여러 방향에서 시도하는 ‘다른 존재-되기’의 질문 속에서 우리 각자는 고정관념을 깨고, 조금씩 자라고, 더 확장된다.
‘공부 열심히 해서 뭐가 되고 싶어요? 이 세계를 더 낫게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 차라리 아무 것도 되지 않기로 해요.’ 각자의 꿈을 향해 바지런히 걷는 학생들에게 이런 불편한 질문을 던질 때도 있다. 아픈 몸, 다친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간 낭비가 아니라 미래의 나를 만나는 일이라는 것. 그러니, 똑똑, 같이 가자고, 연약하고 작은 씨앗들을 보듬어 안자고 다짐하는 아침 강의실. 있다가 없어진 아이, 없다가 나타난 아이, 막 잠에서 깬 아이가 와글와글 함께 아우성이다. 여기, 우리, 그래서 무언가가 되어간다고.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