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성의 영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가능하다.
하느님은 과연 전지전능할까. 하느님은 당신이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창조할 수 있을까.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이 있다면 전능하지 않은 것이고, 그런 돌을 창조할 수 없다면 역시 전능하지 않다. 또 하느님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 배꼽이 있다면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 배꼽이 없다면 그런 인간을 완전한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하느님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 내가 지금 들고 있는 볼펜을 던진다고 마음먹으면 하느님은 그것을 막지 못한다. 하느님은 능력이 형편없어 보인다. 전능하지 않다. 나 하나 이길 힘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는 1~3차원에 발을 디디고 사는 인간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하느님은 5차원, 6차원, 더 나아가 무한대(∞) 차원에서 존재하는 분이다. 이성적인 방법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느님이 거하시는 무한대의 차원,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무한대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직접 허리를 굽혀 다가오시기 때문이다.(마태 28,20 참조) 태중의 태아는 비록 인터넷 소통 방법을 모르지만, 참으로 오묘한 방법으로 어머니와 소통한다. 그 소통의 끈은 사랑이다. 태아는 어머니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고 반응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존재에 대해 논리적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느님과 참으로 오묘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 이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맘대로 산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런 우리의 죄 앞에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실 뿐이다. 이는 우리가 1~3차원 이성의 영역에서 삶을 꾸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느님의 영역인 무한대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하느님이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화가 김환기(1913~1974)가 말했다. “낮에는 빛이 아까워 그리지 않을 수 없고, 밤에는 전깃불이 아까워 그리지 않을 수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낮에는 빛이 아까워 쓰지 않을 수 없고, 밤에는 전깃불이 아까워 쓰지 않을 수 없다.
무한대의 영역에서 오는 무한한 은총을 느끼면, 그 은총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하느님을 이길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쓸 수 밖에 없다. 부족한 나와 함께하기 위해 창조주가 허리를 굽혀 직접 다가오신다는 그 큰 ‘복음의 기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