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최초로 던진 질문은 공교롭게도 ‘사람’이란 이름을 지어주신 ‘아담’에게였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이는 태초에 첫 죄를 지은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의 질문이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역사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물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나와 잠자리의 갈등’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성찰합니다.
다른 곳은 다 놔두고 / 굳이 수숫대 끝에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은 이유가 뭐냐?
내가 이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태초에 인간에게 던진 하느님의 질문은 죄인인 아담을 찾으시는 물음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지금, 여기 역사의 현장에서, 일상의 삶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물으시는 질문인 것입니다. 과연 나는 내 분명한 신원의 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것입니까?
사제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나아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도리와 사명에 어긋나지 않는 자리에 서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두 번째 물음은 동생 아벨을 참혹하게 죽인 형 카인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그러자 카인이 뻔뻔스럽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어쩌면 우리가 매일 핑계와 속임으로 내 죄를 감추려 드는 대답과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형이 동생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동생을 지켜야겠습니까? 이는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되는 성찰이며 물음인 것입니다. 지구의 환경을 만물의 형인 인간이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야 합니까? 혈육으로는 동생이지만,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를 가진 형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이때 정상인 동생은 형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 내가 연세 드신 부모님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자식인 내가 늙으신 부모님을 지켜야 하는 형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 질문은 비단 혈육의 탄생 순서에 따른 형과 동생을 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신앙에 열심인 아내가 있는데, 믿음을 등진 남편이 있다면 아내가 형이고 남편이 동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형인 아내는 믿음의 동생인 남편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틀림없는 첫 번째 상속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것을 지켜야 하는 형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그러므로 만물의 형인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그럼에도 늘 핑계를 일삼고,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는 죄 많은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용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신학교 ‘그리스도론’의 대가이신 교수 신부님은 노년에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저지르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치우시는 분이시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늘 저지르는 존재의 역사였습니다. 철부지 자식들이 저지른 온갖 어지럼과 잘못을 끊임없이 치우기만을 되풀이하셨던 부모님으로서의 역할이 하느님의 몫이었습니다. 때문에 독일의 신학자 요하네스 브란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인간에게 예속되고 훼손당할 각오로 계신다는 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다. 자유이신 하느님께서 마치 사랑스런 아이 앞에서 꼼짝 못하는 부모처럼 우리에게 예속되려 하신다.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닌가? 하느님 사랑의 어리석음!”(요하네스 브란첸, 「고통이라는 걸림돌」 바오로딸, 45쪽)
우리가 인생의 풍랑에서 죄와 유혹으로 좌초하며 절망으로 자주 괴로워할 때, 자비의 하느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 우리 곁에 현존해 계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와 희망의 불빛인 등대와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요나는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 내게 비난과 아우성과 비웃음으로 책임을 물을 때, 오직 주님만은 사랑 지극하신 자비의 눈길로 나를 살피시고 내 길을 다시 열어주십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