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는 구치소와 교도소, 청소년 수형자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열 번의 봉사자 교육을 받고 담당 신부님 면담을 거쳐 발령받아요. 저는 남부구치소에서 교리교사 일을 하고 있죠. 봉사자는 주로 미사 전례를 돕고 간식을 나눕니다. 여자구치소의 봉사자 자매님들은 그들과 직접 접촉하기도 해요. 1년쯤 봉사하다 보면 ‘여기에 참 잘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도 교육 이수하고 봉사하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11월 9일 가톨릭교리신학원(이하 신학원) 2학년 졸업반 강의실. 경찰·북방·공소 선교 등 6개 단체 설명회가 있었다. 선배들의 봉사 러브콜에 예비 선교사들도 귀를 기울였다.
“신학이 ‘밥 먹여주는’ 시대 만드는 노력 필요.” 가톨릭신문 11월 12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이 눈길을 확 끈다. 편집기자로 정년을 채운 필자에게 ‘밥 먹여주는’이란 표현이 낯설지만 ‘잘 뽑았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교회 내에서 신학을 공부할 곳이 충분치 않고, 이후 신학자로 계속 살아갈 진로도 마땅치 않다. 신학이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해야 할 일, 이른바 ‘전 신자 신학하기’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평신도 주일 기획으로 ‘평신도 신학자’를 다룬 기사에 크게 공감했다. 신학원을 나온 선교사, 교리교사들의 현주소와 겹치면서 교회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단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교회는 시노달리타스와 시노드적 교회를 표방하며 성직자·수도자·평신도의 주체적 참여를 모색하고 있다. 사제는 먼저 교회 안팎에서 늘 공격받고 있는 성직주의를 내려놓고 평신도의 보편사제직 수행을 도와야 한다. 그렇기에 평신도도 하느님에 대한, 그분을 향한 신학을 공부해야 할 까닭이 충분하다. 게다가 평신도 신학자와 선교사는 교회를 위해서도 키우고 활용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필자는 어느새 신학원 생활 2년의 마침표 부근에 서 있다. 대부분 시간을 수업과 신학 서적에 묻혀 살다 보니 책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는 습관이 생겼다. 좋은 것은 나눠야 제맛이고 상생이 아니겠는가. 매일 아침 단톡방에 서너 문장을 짧게 올리고 있다. 학우들과 몇몇 지인들의 반응이 좋다. 그 몇 줄을 뽑기 위해 독서하고 공부하는 게 또 다른 루틴이 됐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평신도로서 신학하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평신도 신학자는 수적으로도 극소수일뿐더러 그들이 국내외에서 전공한 학문을 써먹을 강단이나 연구소 등이 턱 없이 부족하다. 신학원만 봐도 이번 학기 과목을 맡은 26명 중 평신도 신학자는 4명뿐이다. 본당 특강에서도 평신도가 마이크를 잡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분명한데도 미래를 걸 만한 자리와 당근이 없고 교회의 관심과 지원도 미미하다. 평신도 선교사의 사정도 오십보백보다.
서울대교구의 유일한 평신도 선교사·교리교사 양성기관인 가톨릭교리신학원. 최근 내년도 입학안내서를 여러 곳에 보냈다. 학우들이 본당 주임사제를 찾아가 직접 전하기도 했다. 서울과 수도권 4개 교구의 본당들, 통신과정 수강생들 앞으로 발송한 봉투만 1000개가 넘는다. 230곳이 넘는 서울대교구의 본당 10곳 중 1곳 꼴로 지원자를 한 명씩 보내준다면 23명이다. 학과 개설 최소인원 15명을 훌쩍 넘기며 미개설, 폐과 걱정을 훌훌 날릴 수 있다. 교구와 본당에서 발상의 전환과 의지가 급선무다.
“디지털 환경 속에 사회 전반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평신도들은 교회를 알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달 29일 마무리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본회의 제1회기 「종합 보고서」에 또 꽂혔다. 평신도의 사명에 대한 진술이 성경 구절을 소환한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가 주인의식을 갖고 소명을 이루자고 나부터 다짐해 본다.
고계연 베드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