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구세주 예수님,
저희 죄로 상처를 받으시고
온몸이 헤어지셨으니
저희에게 풍부한 은총을 내리시어
지난날에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품을 찾아 들게 하소서.
위로받으셔야 할 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받을 분이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중에 계셨음에도 예수님을 위로하러 온 예루살렘 부인을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잘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묵상할 수 있는 것은 위로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고통을 겪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의 상황에 안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위로를 통해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루카 23,28)
“저 사람 이혼했다는데 불쌍해서 어쩌지? 내가 위로해 주어야겠다.” “저 사람 사업이 망했다는데 참 안됐어. 내가 그 집에 한번 찾아가서 함께 해 줘야겠어.” “저 사람의 영적 수준이 낮아서 불쌍해.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함께 기도해 줘야겠어.”
물론 타인을 도우려는 의도는 좋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영적 상황입니다.
나를 먼저 제대로 돌아본다면 정작 가장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위로하기 이전에 위로의 샘이신 예수님께 먼저 찾아가 나 자신이 위로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참으로 위로받은 사람, 고통을 승화시킨 영혼이야말로 진정으로 타인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나 자신의 십자가는 잊은 채, 타인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 죄도 깨닫지 못하면서 타인의 죄와 형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요.
남을 위한 눈물 이전에, 나 자신을 위한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먼 이는 눈먼 이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글 _ 안성철 신부 (마조리노, 성 바오로 수도회)
삽화 _ 김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