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요나 1,12)
잔혹했던 2차 세계대전,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한 남자가 절규하며 외쳤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나치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이번 전쟁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라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용소 동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토록 잔인한 나치에 의해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는데, 너무도 많은 어린이들이 꽃 피우지 못하고 슬픈 죽음을 당하였는데, 삶의 보금자리가 무너지고 희망이 무참히 짓밟혔는데, 이런 끔찍하고 엄연한 현실 앞에서 당신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 그래서 당신은 죽어야 하는 것이오.”
이렇듯 참혹한 전쟁이나 역사의 위대한 현장에서만 자신을 내어 던지는 투신의 삶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나의 투신은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매일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그 악에 맞서며 당당히 “아니오!”라고 말하며 자신을 내어 던지는 숭고한 삶은 어느 날 그냥 주어지는 용기가 아닙니다.
순교자들이 순교의 두려움과 맞서야 했을 때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역시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정의로운 용기는 이미 매일의 삶에서 자신을 버리는 크고 작은 투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만원 버스의 긴 줄에서 갑자기 연세 드신 어르신이나 장애를 가진 분이 나타났을 때, 여러 갈등이 일어도 고단하게 기다린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 빠듯한 살림살이 중에 어려운 이웃을 만났을 때, 기꺼이 작은 재물을 나눌 수 있는 용기, 추운 겨울 나보다 더 춥게 지내는 이웃에게 내 외투를 입혀줄 수 있는 용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장마철에 기꺼이 내 우산을 내어줄 수 있는 일상의 사랑이 반복될 때, 그 사람은 생명까지 내어놓는 투신을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순교자들은 그렇듯 매일 투신의 삶을 사신 분들이셨습니다. 궁핍한 가운데 쌀을 나눌 수 있었고, 한때 노비였던 비천한 신분의 하인일지라도 존중할 줄 알았고, 세례를 받으면 형제요, 자매로 부르며 신분의 제도를 없앴던 것입니다. 나아가 출세의 길이며 집안의 자랑이며 때론 목숨처럼 소중한 관직도 헌신짝처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자유, 그 같은 매일의 투신이 있었기에 끝내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1929~1968) 목사는 삶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진정한 투신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중대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편안하고 안락한 순간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과 논란의 순간에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위해 죽지 않으려는 사람은 살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러 두려움 가운데 투신의 결정을 망설일 때, 주님께서는 이렇듯 용기를 주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8.30–31)
우리의 삶은 매일, 매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고귀함, 숭고한 결단, 그저 사라지는 세상적인 욕망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자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은 늘 그렇듯이 조금은 귀찮고, 아깝고, 때론 아프고 위험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작은 투신의 삶이 쌓여 끝내는 소심한 작은 우물을 벗어나 위대하고 넓은 성인들 반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요나는 제게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 줍니다.
“제가 저 두렵고 떨리는 파도에 나를 맡겨야 했을 때, 제 자신이 그리로 뛰어들어야 했을 때 공포의 전율이 저를 감쌌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두려운 바다에 뛰어내리자, 정작 폭풍의 바다가 가장 안전한 안식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참회의 투신을 보시고 큰 물고기의 뱃속, 그 안락함으로 저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