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 남편이 글쎄, 김치 국물을 흘린다. 깔끔한 사람인데. 마주 앉은 나의 한 마디. “여보, 심보선 시인의 시 중에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있는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어,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당신 반찬 흘리는 거 보니 비가 새는 거 같아.” 그러니 이 남자, “내가 뭘 흘렸다고 그래?”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다.
나는 이어 말한다. “아니, 괜찮아, 시는 이렇게 이어지거든. 들어봐.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오늘도 열심히 사랑을 꿈꾸고 새 지붕 얹고 와.” 엉뚱한 대화로 웃은 아침 30분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마주할 때도 비슷하게 시를 이용한다. “여러분, 지금부터 우리는 슬픔이 없는 세 시간을 보낼 거예요. 이 교실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이 시간,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해볼까요? 오늘 강의실을 나갈 때는 강의실을 들어설 때의 여러분과는 분명 뭔가 다른 변화가 있을 거예요. 지금부터 우리, 슬픔이 없는 세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눈을 반짝인다. 이렇게 나는 시에 기대어 매번 삶의 생기를 새로이 찾는다. 오늘 새벽에 만난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순간 요 며칠 좀 무지 괴로웠던 감정이 찬찬이 떠오르면서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 도시가, 우리 삶의 터가 꿈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면서 좀 지쳐 있던 참이었다.
꿈이란 아직 오지 않은 미래형이라서 허상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꿈은 지금의 현실을 다르게 보게 하고 반짝반짝 윤기 나게 닦아준다.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지? 돌아보면 나는 지치는 나날 중에도 나만의 꿈을 계속 꾸고 있다. 말의 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망할 말도 많지만 사람을 구하는 말도 많다고, 말과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잃지 않고 있다. 글을 기도 삼아 꿈이 사라지는 시절, 꿈을 긷는다.
예리한 우리 학생들은 가끔, “선생님 글은 너무 착해요, 좀 엇나가고 싶으실 땐 없으세요?” 하며 묻는다. 나라고 엇나가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런데 어찌 보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조금은 엇나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글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라고 늘 말하니까. 우리 각자 스스로 하느님을 대면하는 응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늘 말하니까. 학생들에게도 편한 대세를 따르지 말고 한 번 더 뒤집어 보고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 보라고 이야기하니까. 허위에 쉽게 물들기 쉬운 시절, 글을 쓰며 나는 늘 나를 곧추세운다.
바쁜 오늘도 꿈을 꿨다. 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 문제를 두고 고민한 회의 두 시간 후 슬픔이 없는 세 시간의 수업을 하고 우크라이나가 고향인 학생이 장학생 추천서를 부탁해서 한 시간 정성들여 추천서를 썼다. 전쟁 중인 고국을 떠나와 타국에서 홀로 열심인 학생을 떠올린 시간,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는 신비란! 일을 마무리하고 스산한 겨울바람 부는 귀가 길에 문자를 받았다, ‘원고 언제 주시나요?’ 또 이렇게 한담(閑談)이라는 선물과 함께 한 시간. 오늘 슬픔이 없는 다섯 시간 삼십 분, 오롯이 기쁨이었다. 만세다.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