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서강대학교 정문에 제작되는 성탄 구유는 예수님의 탄생을 그려내는 동시에 한 해 동안 우리 가운데 벌어진 아픈 사건을 위로하고, 희망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4년에는 ‘세월호의 아픔’을, 2019년에는 ‘위안부를 기억하는 위로와 평화’를, 2021년에는 ‘사랑으로 이겨냄’을 주제로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이웃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도록 애쓴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14년 제작된 ‘세월호의 아픔’ 구유를 조배하며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가운데서도 국가를 믿고 구조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받아주시도록 기도했고, 아울러 그들을 주님 곁으로 떠나보낸 부모님과 유가족들의 눈물을 예수님께서 닦아주시길 청했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성당이나 가정에 구유를 만드는 풍습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풍습이 점차 교회 안에 자리잡았고 이제는 종교를 떠나 연말 장식물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월이면 백화점이나 호텔 등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성탄구유와 성탄트리를 쉽게 볼 수 있고, 이런 곳에 제작된 구유는 크고, 높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아기 예수님을 모십니다. 구유가 예수님께서 오심을 드러내는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2023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곳에서 태어나실 예수님은 어떤 구유에 모셔야 할까요?
우선, 삽을 하나 준비합시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루카 2,7 참조) 구유에 예수님을 모셨지만, 지금은 떨어지는 포탄과 군인들의 총과 칼을 피하기 위해 삽으로 땅을 파서 지하 방공호를 만들어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2000년 전 구유보다 더 누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공호가 아기 예수님을 모실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지하에 구유를 제작하면서 동방박사들이 혹시 지나칠지 모르니 우리만 알 수 있는 표시를 땅에 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2023년을 드러내는 ‘성탄 구유’가 아닐까요?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외아들을 기꺼이 우리 곁에 보내주셨는데 세상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듯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가득한 이곳에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것’(루카 9,58 참조) 같습니다.
이효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가톨릭신문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