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저녁, 우리 가족은 낙스빌 한글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와 아내는 이곳에서 교사로 봉사하고, 우리 아이들은 학생으로서 수업에 참여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문화를 배우며 전하는 것, 하느님께서 주신 감사한 선물이다.
지난주, 쉬는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과 넌센스 퀴즈를 했다. 예를 들어 ‘사과가 웃으면 무엇이 되는가?’ 같은 질문에 ‘풋사과’라고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장난스러운 농담들이 아이들에겐 즐거운 놀이였다. 내 차례가 되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정답은 ‘과’, ‘하늘’과 ‘땅’의 중간 글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반의 한 학생이자 내 아들인 지섭이가 ‘가득 찬 그 영광!’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들은 ‘하늘과 땅’ 하면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것이다. 그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틀렸어. 정답은 ‘과’야”라고 말했지만, 아들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지섭아, 네 말이 맞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가득 찬 그 영광이 있지.”
아이를 키우며 느끼고 배운 것 중 하나는, 아이들이 하느님을 어른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라고 말씀하셨던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배우고 느끼고 새롭게 깨닫는다. 그러나 아이들을 통해 배우는 것 중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아이들의 존재 그 자체이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도 위대하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사랑에는 상호 책임과 의무가 수반된다. 반면, ‘아버지’가 되어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갓 태어난 아이를 안을 때 느껴지는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더 크게 자라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주셨다. 생각해보면 정말 놀랍다. 하느님은 ‘감히 못 올려다볼 존재’, ‘영원히 닿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자식을 향한 내 사랑을 감히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큰 사랑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내리사랑,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나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곤 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잘 알면서도 받은 사랑의 반도 표현하지 못하고 잊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내리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에 대한 응답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의 근원임을 상기시켜 준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사랑을 나누고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나를 포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주변에 나누며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하느님께도 부모님께도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커 받은 만큼 돌려드리기는 힘들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하느님도 부모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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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새 필자
◇이상근(마태오) 미국 테네시 오크릿지 국립연구소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학사(2005년 졸업)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과 박사(2012년 학위수여) △미국 테네시 낙스빌 한인 천주교 공동체 회장 △페이스북 페이지, 블로그 ‘가톨릭 신앙의 발걸음’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