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문제를 냈다.
“내 일도 감당하기 어려워서 남의 어려움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뜻의 속담은?”
정답은 ‘내 코가 석 자’였다. 아이들이 문제가 어렵다며 힌트를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속담에 ‘코’자가 들어간다.” 아이들의 답은 다양했다.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고, 휴지도 코 풀려면 안 보인다.’ 그나마 이 정도는 이해할 만했다. 선생님이 목덜미 잡고 뒤로 넘어진 대답은…, ‘소 잃코 외양간 고친다’였다.
내 코가 석 자였다. 1994년 1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처음 도착한 내가 그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도시를 처음 경험하는 강원도 시골 촌놈은 당장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어른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다.” 이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린다는 말에, 걸어갈 때 늘 주머니 속 지갑을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 사람이라면 일단 의심의 눈으로 봤다. 코가 석 자였던 나는 다른 사람이 코 베어갈까 코를 꼭 잡고 살았다.
그렇다면 30년 세월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코 베어 가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됐으니, 이제는 적어도 코 베일 염려는 덜어도 되지 않을까.
천만에. 타인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과거보다 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서울에서만 코를 조심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있는 안방에서도 코를 꽉 잡고 있어야 한다. 스미싱 때문에 모든 수신 전화를 일단 의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 베이지 않기 위해 코를 꼭 잡고 살아야 하는, 이 ‘내 코가 석 자’의 싸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많이 가지려고 싸우는 것은 아마도 내가 가진 것이 적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내 코가 석 자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사실 우리는 풍요롭다.(마태 6,31; 묵시 21,6 참조) 이미 모든 것을 받았다. 코 베이지 않기 위해 코를 꼭 잡은 손의 힘을 풀자. 코를 막고 있기에 거저 받은 풍요로운 공기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이미 받았는데, 조금 빼앗기면 어떤가. 나눠주면 어떤가. ‘소 잃코 외양간 고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의 코는 석 자가 아니다.
글 _ 우광호 (라파엘,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