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지나는 11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 ‘많이 가난해지는 달’, ‘물물교환하는 달’이라 부른다. ‘얼굴이 딱딱해지는 달’이라는 재밌는 이름도 있다. 기온이 내려가고, 겨울이 찾아들고, 곡식 거두어들인 들판이 텅 비고, 살림을 아껴 살아야 하는 시기로 진입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아 문명이 건설된 그 나라에서 11월 마지막 주말은 추수감사절 이후 ‘블랙 프라이데이’가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할인으로 무더기 쇼핑하는 날이다. 팬데믹 이후 온라인 쇼핑이 일상이 된 이즘에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매출이 대폭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11월 마지막 금요일은 ‘아무 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이기도 하다. 1992년 캐나다의 한 예술가가 사재기 쇼핑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아 제안한 날이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70여 나라가 이날을 기린다. 물물교환을 하며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신이 뒤늦게 피어나는 셈이다.
2000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 가장 놀랐던 게 쓰레기통 크기였다. 집집마다 성인 남자가 들어가 앉아도 넉넉한 크기의 쓰레기통이 떡하니 자리해 있는 풍경. 그땐 분리배출도 안 해서, 소비주의가 만연한 미국식 생활로는 지구가 여섯 개 필요하다며 혀를 차곤 했다. 하지만 살다 보니 나 또한 그 생활에 금방 익숙해져서 몹시 찔렸더랬다. 2020년 안식년을 보낼 때 보니, 집집마다 노랑, 파랑, 검정 각기 다른 색의 쓰레기통을 비치해 분리배출을 한다. 환경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지구는 이미 감당하기 힘든 환경 위기로 아프다.
유난히 짧은 가을을 뒤로 하고 추워진 날씨에 서둘러 겨울옷을 꺼내는데, 뒤에서 남편이 한마디 한다. “당신 옷 좀 사지 그래? 요즘 쇼핑 안 하네?” 고마운 제안이긴 하나 옷을 안 사기로 결심한지 제법 되었다. “갑자기 인생에 회의가 왔어?” 심각한 표정으로 남편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이미 있는 옷도 충분하다고, 더 사면 지구에 죄를 짓는 것 같다는 내 말에 남자는 걱정을 덜고 웃는다.
아무 것도, 더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말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된 옷장을 보고 하는 건 아니다. 정말 우리는 넘치도록 많은 걸 가지고 산다. 넘치는 옷, 넘치는 종이, 넘치는 물, 넘치는 술, 넘치는 음식, 넘치는 볼펜, 넘치는 컴퓨터, 넘치는 차, 넘치는 전기. 다음 세대를 생각 않고 내지르는 소비주의 문명의 속도 속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이고, 지고, 갖고, 쓰고 있다.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생각 없이 물을 흘려보내고 전력 공급이 아슬아슬한 계절에도 원 없이 에어컨을 튼다.
그 사이 지구 다른 곳에선 땅이 쩍쩍 갈라지고, 넘치는 쓰레기로 바다가 신음한다. 덜 쓰고, 덜 사고, 덜 소비하고, 있는 걸 아껴서 쓰자는 말은 촌스러운 말로 치부되고 빠르게 소비하고 바꾸는 속도전의 삶을 저마다 즐긴다. 물건도, 사람도 소유하려고만 든다. 갈급한 욕구를 어쩌지 못하고, 모두가 허덕이고 보챈다. 말라가는 계절, ‘무소유의 달’ 12월을 앞에 두고 내려놓기를, 나누어 갖기를 연습하려 한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더 아프면 안 되겠기에.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