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제국에 머물지 않고, 탈출을 시도한다. 성경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이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전하지만, 정작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들어선 그들은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경이 표현하는 이집트의 삶은 역설적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탈출 2,23)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민수 11,5)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이집트의 삶과 광야의 여정은 결국 삶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강제노역과 함께 언급되는 이집트의 부유한 삶은, 결국 부유함이 강제노역과 다를 바 없는 노예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라는 부유하고 거대한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 부유함이라는 삶의 자리는 그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주함을 선사한다.
신앙적인 의미로 볼 때, 정착하며 안주하는 삶은 성경이 제시하는 본연의 삶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정착을 그리고 있는 여호수아기에 이어서 전해지는 판관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순종의 죄를 고발한다. 사실 반복된 죄의 원인의 한편엔 정착한 삶에서 일어나는 안주하는 태도가 자리한다. 유독 성경은 머무르고 안주하는 삶에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머물러 안주하는 삶에 대한 성경의 예리한 비판은 창세기 이야기 초반 바벨탑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1-4)
바벨탑 사건은 동쪽에서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신아르 지방에 자리를 잡고 사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안에서 성경은 정착의 삶을 표현하는 데에 전형적으로 쓰이는 “머물러 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야삽 ‘????’을 사용한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이 동사의 주어를 명시하지 않는다. 즉, 자리를 잡고 사는 이들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머물러 살려고 하는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스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기를, 계속 한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다짐한다. 그러나 이름 없이 등장한 이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들은 한순간에 성경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창세 11,8)
바벨탑 이야기는 머무르고 안주하려는 삶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성경은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도 연이어 소개한다. 11장 바벨탑 사건에 이어 족보 이야기와 함께 아브라함의 이야기(12장)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지만, 그 바탕엔 아브라함의 떠남이 자리한다. 그는 여정을 떠나는 이들의 조상이다. 히브리어 본문, 12장 첫 문장의 앞부분만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떠나라!”
아브라함은 움켜쥐고, 머무르고, 안주하며 자만 자족을 누리려는 이들, 그리하여 곧 사라질 이들 앞에서 영원히 기억될 떠남의 여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