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코로나19에 걸렸다. 첫 감염 후 1년 9개월 만이다. 두 번째라 덜 아플 줄 알았는데 웬걸, 삭신이 쑤시고 목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두통과 오한은 덤이다. 동네 병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약을 처방받아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불현듯 한 생각이 들었다. ‘30대인 나도 코로나로 이렇게 힘든데, 60대 패트릭 번 주교님은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1947년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한국에 파견된 패트릭 J. 번(Patrick J. Byrne, 1888~1950, 메리놀외방전교회) 주교. 그의 존재는 세계 최초로 교황청이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증거였다. 소임에 충실했던 번 주교는 1948년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받도록 힘쓰기도 했다. 이토록 한국을 뜨겁게 사랑한 목자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양떼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았다. 그리고 북한군에 잡혀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반도 북쪽 끝 중강진까지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62세 고령인 번 주교는 폐렴에 걸렸고, 결국 그해 11월 25일 차디찬 수용소 바닥에서 선종했다. 그는 임종을 지킨 동료들(비서 윌리엄 부스 신부·춘천지목구장 토마스 퀸란 몬시뇰)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지요.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어요.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가장 큰 은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고난을 겪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교황청 수교 60주년을 맞아 번 주교의 업적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지금. 뜻밖의 순간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부디 번 주교를 비롯한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가 복자품에 오르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