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교구/주교회의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장애(인)에 대한 인식

[월간 꿈 CUM] 전대섭의 공감 (6)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한때 보고싶은 친구나 지인을 찾아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방송을 볼 때마다 저도 꼭 찾고 싶은 친구가 있었지요. 중학교 2학년때 같은 반이 되어 2년 동안 어울렸던 현준구라는 친구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던 그에게 저는 탁구를 배웠습니다. 준구가 워낙 착하고 친절한 성품이어서 좋아하기도 했지만 가정형편이 저보다 훨씬 좋았던 준구와 다니며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는 재미도 컸습니다. 준구와 저는 내기 탁구를 자주 쳤습니다. 준구는 질 것이 뻔하지만 제가 그냥 얻어먹기 민망할까봐 순순히 제안에 응하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참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 역시 신체 장애의 아픈 체험을 짧지만 강렬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날 사고로 왼쪽 무릎을 크게 다쳤습니다. 예정 보다 빨리 롱깁스를 푼 다음 날 저는 누나의 팔에 의지한 채 바짝 마른 다리를 절룩거리며 입학식에 갔습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배정된 반 교실로 이동하는 도중에 주변 동기생들이 “쟤는 소아마비인가 봐”라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순간 제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필 진학한 학교가 남녀공학이었으니 제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갑자기 과거를 소환한 건 최근 모 정당의 대표가 한 장애인 폄하 발언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며 출근길 집단 행동을 한 장애우 단체들에 대해 “시민 불편을 볼모로 하는 어떠한 행동도 용납될 수 없다”, “비문화적”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볼모’는 나쁜 의도를 갖고 고의로 해를 가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장애인들의 생존요구가 그에게는 한낱 볼모로 비춰졌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이후 마련된 장애인 대표와의 방송 토론에서도 그는 가르치려 하고, 논리와 말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감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읽히지 않았습니다. 

장애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장애우들의 불편과 고통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져야 할 공생의 과제입니다.

1980년대 영국에서 장애인 차별금지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장애인들에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시민들이 당신들 때문에 큰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사는 내내 불편을 겪습니다.” 누가 누구의 불편을 돌보아야 하겠습니까.


글 _ 전대섭 (바오로, 전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가톨릭신문에서 편집국장, 취재부장,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바보’라는 뜻의 ‘여기치’(如己癡)를 모토로 삼고 살고 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1-0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11. 26

마태 6장 4절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