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 성적을 올리고 연구실 책상을 정리했다. 한 학기를 마감하는 날, 난방이 꺼진 연구실은 저녁이 깊어갈수록 쓸쓸하고 춥다. 가방을 챙겨 집으로 오는 길, 운전대를 쥐고 묵주기도를 드린 다음 습관처럼 시를 중얼거린다. 오늘은 시인 기형도의 시, ‘비가 2’다. 시 끝자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학생들에게 이 구절을 가끔 들려준다. 죽고 싶다는 아이, 꿈이 없다는 아이, 앞날이 두렵고 겁난다는 아이, 자기소개서와 서류를 수십 통 냈는데 합격 소식이 없다며 우울해하는 청춘에게 말한다. 가슴을 활짝 펴라고, 삶에 별 낙(樂)이 없어도 절대 죽지 말라고. 살다 보면 지금 고민, 지금 절망이 작아지는 날이 온다고. 자신에게만 기대지도 말고, 어떤 큰 힘을 믿으라고.
이런 말이 청춘에게 어떤 위로나 힘이 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의 절망이 실은 지나가는 삶의 한 자락이라는 것을 안다면, 모든 일은 다 지나간다는 걸 안다면, 그래서 나쁜 날 지나고 좋은 날도 온다는 걸 안다면, 하루 버틸 힘이 생기지 않을까 믿는다. 하루를 버티다 보면 이틀을, 일주일을, 한 달을 버틸 수 있다.
코로나19 때 제자가 목숨을 버렸다. 그 아인 작은 일에도 큰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마음결이 여렸더랬다. 그 아이가 짊어진 고민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한 미안함이 아직도 내겐 남아 있다. 오늘 또 한 죽음을 듣는다. 가족에겐 아들이었고, 형제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경력의 정점에 있던 배우였다. 죄가 특정되기도 전에 언론에 피의사실이 적나라하게 공표되었고, 온갖 선정적인 문구 속에서 버려졌다. 수치심과 치욕과 당면한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지만 누군들 그걸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이미 죽음보다 더한 치욕과 공포를 겪었을 것이니.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죄를 짓는다. 죄의 무게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죄를 감지하고 각인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죽여도 당당하고, 어떤 이는 죄를 뒤집어쓰고도 죄인인 양 살아간다. 공권력에 의해 조작된 죄 속에 담금질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이들도 많다. 하느님 보시기에 누가 더 죄인일까. 대중 앞에서 고개 조아린 그가 더 죄인일까. 나오지도 않는 증거를 찾아 몰아붙이며 권력으로 인간을 조롱한 이들이 더 죄인일까. 자극과 욕망 속에서 서로를 질시하고 분노와 화의 불길로 세상을 태우는 오늘 이 세계를 하느님은 어떻게 보실까.
너무 쉽게 단죄하고 너무 쉽게 조롱하며 끝없이 희생양을 찾는 군중심리 속에서 연약한 이들은 쉽게 죽음으로 내몰린다. 먼 땅에선 진짜 전쟁으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이곳에선 작은 전쟁으로 아까운 목숨들이 속절없이 지고 있다. 죄라고 할 것도 없는 죄 속에서, 마녀사냥 속에서 질식해서.
시인 김종삼은 시 ‘어부’에서 인생을 바닷가의 고깃배에 빗대어 말한다. 풍랑에 뒤집히며 날마다 출렁이는 작은 고깃배. 하지만 시인은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하는 말로 우리가 끝내 믿어야 하는 희망을 전한다. 우리 죄를 대신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이 아직 구유에 누워계시는 세밑이다. 새해엔 용서와 화해와 평화와 기쁨과 온유가 많은 이들의 마음 안에 깃들기를, 그래서 누구든 살아 있기를 바라며 연재를 마친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