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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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평화칼럼] 깜짝 선물

이소영 베로니카(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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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밤을 봉사활동 함께하던 분들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보낸 적 있다. 그 밤, 영성체 예식 중의 일이었다. 성체분배를 위해 뒤편으로 향하던 신부님께서 다시 앞으로 오시더니 평소와 달리 측면 첫 줄부터 성체를 나누어주셨다. 측랑의 앞줄에 앉아 있던 나도 서둘러 나갔다. 신부님이 손바닥에 얹어주신 조각은 뜻밖에 그것이었다. 성찬 전례 중 “내 몸이다” 할 때 들어 올려지는 크고 둥그런 성체를 사제의 손으로 쪼개어 나눈, 바로 그 조각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크림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먹은 꼬마처럼 들떴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느라 혼났다. 큰 성체에서 나온 조각을 받아먹었다며 좋아하다니, 그건 첫영성체 앞둔 아이한테마저 놀림감이 될 법한 유치한 감정일 테니까. 기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성당 벽면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한심해 하는 눈길로 “소영 베로니카 자매, 법학박사의 체통은 대체 어디에 두었단 말이오?” 하시는 것 같았다.

실은 그해 대림 시기 내내 내려놓지 못했던 맺힌 감정이 있었다. 입술로는 고해성사를 드리면서도 자책감과 원망과 두려움이 뒤섞이어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은 어떻게 안 되었다. 묵상하려고 눈을 감으면 내면의 캄캄한 동굴을 두텁고 단단한 얼음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그런 상태로 성탄을 맞이하고 또 한 해가 끝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해 마지막 밤인 그 밤, 미사 도중 어느 순간 얼음벽이 스르르 녹아내림을 느꼈다. 영성체하러 나가면서 부지불식간에 괜찮다고, 이제 괜찮아졌다고 속으로 속삭였다.

실제로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을 테다. 성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장엄한 미사 전례와 아름다운 파이프오르간 연주에 매료되어 잠시 그렇게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평소 그레고리오 성가 듣는 동안만큼은 스스로가 깊은 믿음을 지닌 것 같았고, 테제 성가 부르는 순간만큼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지곤 했으니 말이다. 이는 성냥팔이 소녀가 켜 든 성냥불처럼 찰나적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었고, 신앙의 차원에선 미성숙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 덕분에 잠깐이나마 녹아내린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그분은 반가우셨던가 보다. 반가운 나머지 그 미성숙한 단계에 꼭 들어맞는 깜짝 선물도 하나 준비하셨던 거다. 큰 성체에서 나온 조각. 미사보를 머리에 얹은 채 경건한 표정 짓고서 속으론 그 조각 받아먹었다고 신났을 것을 알고 “이 녀석아, 그렇게 좋냐?” 하며 씩 웃으셨겠지.

당시 나의 ‘괜찮아요’가 지속가능하지 않았듯이 선물의 효과 역시 오래가진 못했다. 무릎 깨져서 ‘앙~’ 울던 꼬마가 달콤한 크림빵을 베어 물었다고 상처가 곧장 아물진 않을 테니까. 혀끝의 단맛이 사라지면 피 흐르는 무릎을 내려다보며 재차 ‘엉~’ 울음 터뜨릴 테니까. 나는 고작 그 정도 그릇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살아내야 했던 하루하루는 미사의 기쁨만큼 그렇게 쉽사리 웃는 얼굴을 보여줄 만큼 내 삶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았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분이 그 순간 함께 계심을. 나의 마음이 얼어붙어 닫혀 있는 동안에는 주위를 서성이다가 조그만 틈이라도 만들어지는 즉시 깜짝 선물을 안고 들어와 ‘호~’ 해주실 것임을 믿었다.

현재 난 봉사활동을 하지도 않고, 그러니 ‘오늘 깨끗이 닦은 창틀과 말갛게 씻은 그릇만큼의 기쁨을 제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해주세요’ 같은 청원을 드리지 못한다. 올해 첫 순간은 성당 아닌 집에서, 오르간 연주를 듣는 대신 넷플릭스 시청하며 맞이했다. 그럼에도 ‘큰 빵에서 나온 조각’ 같은 순간을 그분은 이따금 만들어 넣어주신다. 읽고 쓰고 공부하며 가르치는 매일의 일 안에, 음악이나 이야기 안에,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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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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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꺼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오리다. 주님, 주님의 좋으신 이름을 찬송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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