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직제도가 한참 비밀리에 실천되고 있을 때, 한양의 성균관 근처 김석태의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유생 동료들에게 들킨 사건이 있었다. 이를 1787년 김석태의 집이 있던 반촌(泮村)에서 모임을 했다고 하여, 반회(泮會) 사건이라고 부른다.
1787년 겨울,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여문(儷文: 4,6구로 이루어지는 변려문)을 짓는다는 핑계로 김석태의 집에서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고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설법(說法: 강론이나 설교를 가리키는 말을 당시에는 불교의 설법으로 표현함)을 하였다. 유생 동료였던 이기경이 그들의 여문을 보니 거칠고 조잡하여, 평소 그들의 모습이 아닌 것을 보고 다른 일을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며 물었다. 역시나 그들은 대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하였다. 이기경은 사학 서적을 익혀서는 안 된다고 눈물을 흘리며 강조하였다.(이만책의 「벽위편」에서 발췌)
같은 남인이었던 홍낙안은 더욱 신랄하게 그들의 행위를 비판한다. “표문(表文)을 짓는다면서 밤낮 반민(泮民) 김석태의 집에서 경문을 외운 자들이 과연 그들이 아니란 말인가? 파리 대가리만 한 작은 글씨를 손바닥만 한 작은 수십 권의 책자에 쓰고, 비단보자기에 싸서 궤 속에 넣어둔 것은 그들의 물건이 아니었던가? 아침저녁으로 ‘조만과경’을 외면서, 남이 그 학문을 엄하게 배척하는 말을 듣고는, 원수를 사랑하자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라고 쓰고 있다.(홍낙안, 「노암집」; 정민, 「서학」에서 재인용)
홍낙안은 천주교 신자들이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모습,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영세(領洗)와 송죄(頌罪)라는 용어를 씀으로써 천주교의 세례식과 고해성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인(南人) 내에서 천주교에 대해 경계한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기경과 홍낙안, 천주교 배척하고 비판
안정복은 1784년에 이미 자신의 문하생 권철신과 이기양이 천주교에 빠지고 있음을 경계하면서 편지를 보냈다. “요새 듣자하니 서양 선비의 학문에 그대도 경박한 젊은이들이 앞장서서 이끄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니,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서로 결속하여 신학(新學)의 학설을 열심히 익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서국에서도 일찍이 이 학문을 금지하여 주살 당한 자가 천만 명에 그치지 않았고, 일본도 또한 이 학문을 금하여 수만 명을 주살시켰다고 하네…. 만약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히는 욕을 당하게 되는 이때에 이르러 천주(天主)가 어떻게 해줄 수 있다는 건가?…”(1784년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벽위편」에서 발췌)
안정복은 젊은 문하생들이 천주교 교리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매우 경계하고 향후 남인에게 찾아올 위험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번 편지로 젊은 유생들에게 경고하고 천주교의 위험성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초기 교회 공동체를 형성한 젊은 교인들의 열성은 공공연히 성균관 근처의 공부방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익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를 발견한 이기경과 홍낙안은 그들을 배척하고 천주교의 그릇됨을 비판하고자 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정미반회사건(1787년)이다.
북경 밀사 윤유일, 견진성사 받은 첫 신자
한편, 평신도 성직제도의 문제점을 알게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정확히 문의하기 위해 이제 막 입교한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밀사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북경에 갈 때는 대부분 연행사의 일행으로 따라가면서 비밀리에 백서(帛書: 비단 위에 글을 써서 명주 옷감에 꿰매는 방식으로 위장하여 편지를 전달함)를 만들어 갔다. 윤유일은 분명히 처음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라몽(梁棟材) 신부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라몽 신부는 북경에서 수행하던 관직을 마치고 마카오로 이미 떠난 상태였다. 대신 라자로회(선교수도회) 로(Raux) 신부가 윤유일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필담(筆談)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갓 세례를 받은 윤유일이 조선에서 벌어진 얘기를 들으니, 로 신부는 그의 세례가 의심스러워졌다. 신품성사를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세례 외에 고해성사와 견진성사까지 주고 있다니? 그래서 로 신부는 윤유일에게 조건부 세례(곧 ‘조선에서 받은 세례가 유효하지 않다면’ 이라는 조건을 붙여)를 주었다. 그리고 좀 더 교리를 가르친 후 견진을 받을 준비를 시켜서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을 청하였다. 윤유일은 북경에서 정식으로 견진성사를 받은 조선인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가 견진성사에 임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던지 그 성당에서 지켜보던 선교사와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았다고 되어 있다. 윤유일은 여러 가지 문의를 하고 나서,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돌아왔다.
구베아 주교, 조선 교회 위해 사목 서한 보내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를 위해서 사목 서한을 보내주었는데, 먼저 조선교회는 즉시 모든 성사 거행을 중단시키고 ‘상등통회’에 의지하라고 권고하였다. 진심으로 통회하게 되면 그 자체로 고해성사와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상등통회’를 하면서 주일 집회 때 의무 기도를 함께 외우라고 지시하였다. 또 조선 사람으로서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과 성직자를 조선으로 보내는 방법을 찾겠다고 약속하였다. 윤유일은 더 빨리 성사를 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6개월이 겨우 지나서 다시 북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베아 주교가 ‘조상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곧 신자들은 위패를 모시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절하지 못하고, 공자 사당에서 절하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양반이었던 윤유일은 제사 금지가 가져올 조선의 풍파를 예상하고 구베아 주교에게 제사 금지 조항을 면제해주십사고 요청해보았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교황청의 단호한 규정에 한발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교회는 이제 ‘제사 금지’라는 규정하에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는 오해와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그대로 실천한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은 천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교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