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3)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태초의 세계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계였다. 오로지 인간의 뜻을 중심으로 세우며, 인간의 바람과 원의에 따라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태초의 세상은 뜻과 원의보다 오히려 말씀이 앞섰다. 하느님의 말씀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기에,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실현되는 말씀의 이루심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말씀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이는 한처음에 말씀만으로 충분했으며 온세상은 말씀으로 충만해있음을 전한다. 말씀 이외에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세상. 우리 인간이 살았던 태초의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말씀 그 자체로 충분한 이 태초의 세상에서 유혹자와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변형시키며 자신의 말들을 추가하기 시작한다. 먼저 유혹자 뱀은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꾸면서 의심(불신)을 불어넣는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
이렇듯 말씀에 대한 의심(불신)은 태초부터 인간 주변을 맴돌았다. 이러한 유혹자의 질문에 하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는 하와 자신이 첨가한 말이며, 그가 지닌 욕망을 상징한다. 말씀으로 충분했던 세상에, 유혹자와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바꾸고 첨가하며 그 말씀에 의심을 품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다.
그리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태초의 모습’은 빠른 시간 안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삶 안에서 고통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들이 낳았던 인류의 첫 형제인 카인과 아벨은 형제 살해의 아픔을 겪었고, 그 이후에 이어진 인류는 끊임없는 타락의 길을 걸어 홍수라는 대재앙을 맞이하게 된다.(창세 6-9장)
이렇게 급격하게 망가진 세상은 과연 새롭게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이 회복의 여정은 아브라함을 통해 처음으로 시작된다.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아브라함을 통해 선포된다. 아브람함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뜻과 원의에 따라 바꾸거나 첨가하는 법 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 길은 아브라함에게 분명한 포기의 여정이었다. 그는 고향과 친척과 부모를 떠나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겁고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여정 안에서 그동안 헝클어진 말씀의 질서는 회복되기 시작한다.
아주 먼 훗날 가브리엘 천사 방문의 예수님 잉태의 소식에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실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