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들며 어느덧 세는 나이로는 서른다섯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나 막내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종종 ‘선생님’이라고 불리며 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제가 여전히 청년인 곳도 있습니다. 벌써 짐작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저는 주로 ‘청년’이라 호명되며, ‘청년’으로 발언하고, ‘청년’의 관점에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고, 30대 중반이 되어 이미 가정을 이룬 제가 유달리 교회 안에서는 ‘청년’ 활동가, ‘청년’ 연구자로 소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확실한 답은 역시 교회의 고령화일 것입니다. 교회 기관에서 일하며 참가하는 여러 회의와 행사에서 저는 여전히 가장 젊은 축에 속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팎을 오가며 일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단지 그 이유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년에 관한 담론을 생산하고 소비하면서도 정작 청년들에게 주도권은 허락하지 않는 사회처럼 교회 역시 청년을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타자화한다고 느낀 탓입니다.
어느 순간 ‘청년’이라는 라벨을 붙인 채로 초대하는 자리에는 더는 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물론 더는 청년을 대표할 만한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청년으로서 초대받는 자리에서 자주 느낀 미숙한 의견이나마 들어보겠다는 시혜적인 태도, 부족한 젊은이에게 귀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고마워하라는 식의 안하무인이 이런 결심을 굳혔습니다. 동등한 존재로 수평적인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 자체가 고역일 뿐 아니라 청년에게도 자리를 주었다는 구색 맞추기에 이용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장에서 성당을 떠나는 청년들의 이야기는 단골 소재이지만, 정작 교회를 떠난 청년들의 목소리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떠나는 이들을 분석하는 기성세대의 목소리나, 여전히 교회에 남아 교회가 바라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일부 청년의 목소리만 담길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으로는 아무리 얘기해도, 그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공허한 분석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청년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여전히 아픈 진실에는 흐린 눈을 하고, 혹독한 현실은 마주하기를 피하는 교회의 단면을 봅니다.
적어도 더는 청년들을 잡일에 부려먹거나, 허드렛일을 시키려 부르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내놓는 대안은 무엇이냐 추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똑 부러진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러나 실마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난해 본회의를 시작한 세계주교시노드는 “포용, 대화, 투명성, 식별, 모든 이에 대한 인정과 공동 책임성의 제도적 장”을 이번 시노드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합니다. 이는 교회의 삶과 사명의 모든 부분에서 적용될 기준일 것이나, 특히 청년들과 함께 걷는 길에 관해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시노드의 정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명 안에서 청년들은 공동체의 동등한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책임과 권한 모두를 나누고 있나요? 청년들을 비롯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경청하며, 함께 식별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나요?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우리와 다른 존재를 향한 배제가 아닌 우리를 확장하는 포용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나요?
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