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안유는 서울 연희동 토박이 화교 3세다. 명동의 한성화교소학교와 연희동에 있는 한성화교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대에 산둥성 웨이하이(위해)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온 할아버지는 늘 안유에게 “너는 중국인”이라고 가르쳤고 “자라서 한국인과 결혼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할아버지였지만 그 자신은 전주 이씨 할머니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화교학교 교사였다가 대학교수가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는 많은 화교들에게 충격이었다. 한국은 어느 날 갑자기 중공이라 부르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자유중국’이라 부르던 중화민국(타이완)과 단교했다. 다니던 화교 소학교에서 청천백일기가 마지막으로 내려오던 날을 안유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몹시 슬펐다. 하지만 산둥성 출신이 다수인 한국의 화교 대부분은 한중 국교 수립 이후에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이완의 명문 국립사범대학에 진학한 그는 거기서 다시 충격을 받았다. 타이완 사람들에게 그는 한국인이었다. 여권을 흔들며 “나는 너희들과 똑같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다음에 만나면 “한국에서 온 친구”로 소개되었다. 조상들이 살았던 중국, 태어나 살아온 한국 그리고 여권에 새겨진 중화민국(타이완). 그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마치 서해바다 어디엔가 떠 있는 것 같았다.
대학생 때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는 하느님 자녀로서 새 정체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와 석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는 유학생으로 소개되었고 유학생 대표까지 했다. 올봄에 연세대학교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그는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닿는 학교에서 다시 유학생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가장 오래된 이웃’인 화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서 희생된 조선인에 대해서는 알지만 만보산 사건 이후 1931년 평양에서 벌어진 화교 학살은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토지 소유를 금지한 조치는 많은 화교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배추 장사하던 사람이 땅을 잃고 식당을 시작했지만 짜장면 가격은 정부에서 결정했고 마음대로 올릴 수조차 없었다. 화폐개혁도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화교들에게 타격이 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자 담안유 주변에 재산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각종 제한과 차별 대우로 최고 10만 명에 가깝던 화교는 한 때 2만 명까지 줄었다. 화교가 참정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기회인 지방선거 때 거기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한국은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된 다민족 국가다.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5퍼센트에 육박한다. 언제쯤이면 연희동 토박이 담안유가 가장 오랜 이웃으로 보이고, ‘우리 중의 하나’로 여겨질 수 있을까?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