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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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한담] 치앙마이에서 느리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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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설 연휴를 태국 치앙마이에서 맞이합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온 일정입니다. 거리 곳곳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더니, 한달살기로 벌써 인기가 높은 지역이더군요. 긴 휴가를 온 가족이 함께 즐기며, 느리게 살다 가려 합니다. ‘느리게 살기.’ 마음챙김 명상을 시작하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의미없이 바쁘기만 한지를 느끼고, 이제는 ‘빨리빨리’를 내려 놓고 매 순간을 음미하며 살겠다 다짐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바삐 사는 것이 몸에도 마음에도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는 언제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목록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오가다 보면 하루가 끝나기 마련이거든요.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기 위해 치앙마이 중심부에서 차로 15분 거리 외곽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자갈이 깔린 마당에는 고양이 두세 마리가 오가고, 작은 풀장에는 커다란 잎사귀가 시시때때로 떨어지고, 방 안에 앉아서도 하루 종일 온갖 새소리가 들려오고, 그러다 멀리서 오토바이 굉음도 섞이는, 시골도 도시도 아닌 중간 지대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해야 할 일 목록도, 하고 싶은 일 목록도 간소화하려 합니다. 그렇게 느린 템포로 하루를 길게 살아보려 합니다.

아침엔 아이들과 함께 눈을 뜹니다. 서울에서라면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밥도 챙겨야 하고, 아이들 옷을 꺼내 놓고, 준비물 챙기고,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이곳에선 알람 없이 눈이 떠지는 때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함께 느릿느릿 아침거리를 챙겨 먹지요. 간단히 빵을 먹기도 하고, 태국식 닭죽에 간장을 뿌려 먹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부모님은 느긋하게 샤워를 오래 하시고, 저는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아이들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찾으러 마당으로 달려 나갑니다. 게으른 오전을 보내고 점심 때가 다가오면 슬슬 나갈 채비를 합니다. 일정은 시간을 넉넉히 잡고 한두 가지만 정하고 나갑니다. 한 번은 동물원에 가고, 한 번은 사원 한두 군데를 들러 보고, 어떤 날엔 야시장에서 조그맣고 귀여운 것들을 찾아 쇼핑합니다. 오늘은 미술관 한 군데를 들르기로 하고 길을 나섭니다. 지도를 볼 때와 사진을 찍을 때를 빼곤 스마트폰을 꺼내지 않고, 대신 사두고 읽지 못했던 책 한두 권을 가방에 넣었습니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가 식사하고, 디저트는 과일 스무디가 싸고 맛있으니 종류별로 시도해 봅니다. 카페가 많은 동네이니 하루에 몇 번씩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요.

이런 느긋함, 여유,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은 나날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느리게 살기’라는 모토로 지낸 며칠,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에 천천히 채워지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따져 보면 한국의 일상에서라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인데, 왜 이국에 와서야 더 가능해지는 걸까. 환경을 바꾼 것이 슬로우 모드로 진입하기 더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챙김이 매 순간을 알아차리며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라면, 어쩌면 이곳에서 한 걸음 마음챙김을 향해 걸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장소가 중요할까요. 마음이 중요하겠지요. 긴 연휴, 마음에 한번쯤 느릿느릿한 공백과 여유가 깃드는 시간이 주어지기를, 또 그런 시간을 충만하게 누려보기를 소망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최현정 아가시다(심리상담가·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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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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