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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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꿈 CUM] 꿈CUM 신앙칼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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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통곡(cry unrestrainedly)이었다.

나의 통곡은 대한제국 시절 황성신문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사장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을 슬퍼하여 토해낸 울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그처럼 고결하지 않았다.

나의 통곡은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잡아 찢으며 울었던 ‘다윗의 통곡’(2사무 1,11-12 참조)도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타인을 향한 애가(哀歌)가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작가 최명희(崔明姬, 1947~1998)가 소설 「혼불」에서 묘사한 “목줄띠가 퍼렇게 솟아 쏟아내는 어미의 통곡”도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그런 숭고한 사랑의 유출물이 아니었다.

나의 통곡은 그 날 밤 기도 중에, 진정으로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발견한 뒤 터져 나왔다. 나는 그동안 ‘신앙은 겸손’이라고 생각했었다. 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교만이었다. 원래 가장 낮은 존재인데 더 이상 어떻게 아래로 내려간단 말인가. 겸손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었다. 가장 낮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됐었다.

그 날 밤, 알았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보잘것없는 종의 신분인지 말이다. 교만한 삶으로 인해 파괴된 영혼의 부스러기를 보며 그렇게 나는 한참을 울었다.

구약성경에서 삼손은 참으로 복잡한 인물이다.(판관 13-16 참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폭력을 즐기는 듯한 인상도 보인다. 종교적으로 볼 때 금기인 몸 파는 여자와의 환락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 성경에 영웅의 모습으로 들어온 것은 그의 ‘회개’ 때문이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아들과 딸을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머리카락이 잘려 힘을 잃고 적군에게 체포된 뒤, 두 눈까지 잃은 삼손의 회개와 절규의 기도는 나를 울린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 .”(판관 16,28)

그 날 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목 놓아 쏟아내는 통곡’(cry unrestrainedly), 삼손의 통곡이었다. 그것은 은총이었다. 그것은 복(福)이었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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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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