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2세 교황 관련 문서 비롯
바티칸 금고 텅텅 비었던 일화 등
교회의 숨겨진 뒷이야기 담겨
40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한 바티칸사도문서고는 교회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보고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종교재판 기록과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혼 허가 요청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지역 수녀들이 보내온 전황 관련 라디오 청취 기록 등 종류가 다양하다. 문서의 양은 말할 것도 없다. 지하 2층 콘크리트 벙커에 있는 서고의 선반을 모두 이으면 길이가 85㎞에 달한다.
이 문서고를 45년 동안 지켜온 세르지오 파가노(75) 대주교가 은퇴를 앞두고 문서고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 「비밀」(Secretum)을 이탈리아에서 출간했다. 책에는 나폴레옹의 문서고 약탈, 갈릴레이 사건, 미국 신자들의 긴급 모금으로 개최한 1922년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공개회의) 등 흥미진진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넘친다.
문서고는 얼마 전까지 바티칸비밀문서고라 불렸다. ‘비밀’이란 단어 탓에 사람들은 바티칸이 뭔가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고 수군댔다. 「다빈치 코드」 부류의 소설과 영화가 그런 호기심을 더 부채질했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비밀’이란 단어를 뺐다. 또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이 나치의 유다인 대학살에 침묵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자 “교회는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관련 자료를 전부 공개했다.
책 속의 관심은 비오 12세 교황 관련 문서에 쏠릴 수밖에 없다. 비오 12세 재위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과 동서 냉전 등 20세기 격변기였다. 역사학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은 교황이 왜 나치의 만행에 적극 항거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파가노 대주교는 “당시 교황은 말할 수도 없었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발언하면) 더 끔찍한 학살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며 침묵을 일부 인정했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에라도 가스실로 끌려간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더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비오 12세 교황이 전후에도 침묵을 지킨 이유는 “유다인의 이스라엘 건국 우려 때문”이라고 밝혔다. 교황청은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이 나치의 만행을 비판하면 희생자 유다인들의 건국 운동에 더 힘이 실렸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파가노 대주교는 비오 12세 시성 움직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시성 관련 자료집을 편찬한 두 연구자는 문서고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하느님 종의 삶을 평가할 때 문서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비오 12세가 전후 자선활동과 중부 유럽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앞장선 업적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1922년 콘클라베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당시 재무 담당 추기경이 콘클라베 개최 비용 때문에 바티칸 금고를 열어봤더니 지폐는커녕 동전 한 닢 남아있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라 그럴 만도 했다. 국무장관은 궁여지책으로 미국 워싱턴 주재 교황대사에게 “금고에 있는 돈을 모두 송금해 달라”고 전보를 쳤다. 대사관은 미국 신자들이 급히 모금해준 돈을 보냈다. 암호화된 긴급 전보문이 문서고에 보관돼 있다.
문서고의 진귀한 소장품 중 하나가 1530년 영국 귀족들이 클레멘스 7세 교황에게 보낸 서한 원본이다. 귀족들은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재혼할 수 있도록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포해 달라고 간청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교황은 거부했다. 분노한 헨리 8세는 결국 가톨릭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세웠다. 나폴레옹 군대는 1810년 문서고를 약탈할 때 이 서한을 빠뜨렸다. 파가노 대주교는 “문서고 소장이 서한을 기록 보관실 의자에 있는 비밀 서랍에 숨긴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약탈해간 문서들을 4년 후 대부분 반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