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이십 대 초반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다 보니 종교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을 날것 그대로 접하게 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다양한 종교적, 비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중 천주교와 개신교회를 아울러 그리스도교 배경을 지닌 학생들에게는 특이 사항이 있다. 이전엔 가족을 따라 교회에 나갔지만, 지금은 안 나가는 이들이 많다. 대학에 입학하며 자연스레 멀어진 경우도 있지만, 입학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많다. 이들에게 교회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아니다.
영적 추구에 관심이 없어진 것일까? 흔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기준으로 청년들을 “파편화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대”이며 “실속과 향락만을 찾는 세대”라 진단하지만, 내가 관찰한 바는 다르다. 이들은 기성세대 못지 않게 현실의 지평 너머 새로운 통찰과 지혜를 갈망하고,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추구하고, 기후 위기와 지속가능한 미래에도 관심이 많다. 표현 방식과 서로를 연결하는 방식,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이 기성세대와 다를 뿐이다.
청년들의 영적 추구가 반드시 그리스도교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청년들 눈에 비친 교회다. 우리 삶과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과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학생들과 토론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이가 적대와 무관심을 드러낸다. 청년들에게 교회는 “위선과 배제와 성차별과 혐오와 이기주의가 만연한 집단”이다. 이들은 더이상 교회에 실망조차 하지 않는다.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신들이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귀 기울여 들으려 하는 의지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다.
청년들이 안고 있는 고통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우울, 불안, 고립 등으로 표현된다. 오랜 시간 교회가 사목적 관심을 기울여 온 문제들이고, 교회의 영성 전통도 이들을 살피고 위로할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교구와 본당 모두 이미 오래전부터 청년들을 붙잡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여전히, 아니 갈수록 더 교회에 등을 돌린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문제는 관심과 자원과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교회가 “귀 기울여 들으려 하는 의지가 없다”는 바로 그 지점 아닐까?
지난 1월, 미국의 예수회 잡지 「아메리카」(America)가 주관한 웨비나 토론을 시청했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세계주교시노드 총회(2023년 10월) 첫 세션에 참석한 사제, 수도자, 여성 신자가 패널로 초대돼 경험을 나눴다. 참여자들은 이번 총회가 결과보다 방법론과 진행 과정에 있어 놀랍도록 새로운 회의였다고 입을 모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시노달리타스가 시작될 때부터 산적한 개별 이슈의 해결보다 사고와 접근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종의 비전은 총회 기간 내내 끼어들기가 허락되지 않는 깊은 경청으로 체현되었다. 여성과 이십 대 청년을 포함한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도록 중간에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못했다. 서로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의무적으로 침묵을 가져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을 방지했다. 참여자들은 말하기에 앞서 듣는 자세를 배우고, 일치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다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 토론했다. 그 경험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경청의 자세와 기술이 아닐까? 가르치고 요구하기보다 배우고 수용하는 자세, 교회가 옳다고 주장하기보다 물러나 길을 내어주고 함께 갈 공간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청년과 교회는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