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 (02)
하느님은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예레 14,17) 하느님의 눈물은 우리의 폭력적 성향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폭력이 난무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도로에서도 분노를 참지 못해 보복운전을 하고, 헤어진 애인을 살해하는 세상입니다.
폭력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와 궤를 함께합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창세 4,1-18 참조) 태초에 일어난 카인의 폭력 이후, 인류는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금까지 써오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분노와 폭력의 실타래를 풀지 못하는 것일까요. 잔뜩 부풀어 오른 분노는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야고 1,20 참조) 심리학자인 웨인 다이어(Wayne Walter Dyer)는 말합니다.
“당신이 화를 내든 안내든 간에, 당신이 하는 일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한 컵의 물을 부어 넣는 정도의 영향밖에 주지 않는다. 당신이 웃음을 택하건, 분노를 택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것은 장담할 수 있다. 웃음을 택하면 현재가 즐거워지고, 분노를 택하면 현재가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분노와 폭력은 우리에게 심한 상처와 불행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만약 분노와 폭력이 만질 수 있는 형태의 물건이라면 부메랑의 형태를 띠고 있을 것입니다. 분노와 폭력은 평화의 상실, 우울증, 친구 혹은 배우자 관계의 파괴로 다시 돌아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그 분노와 폭력의 종류들을 나열하십니다.(10항 참조) 살인, 전쟁, 집단 학살, 민족 말살 등이 그것입니다. 교황님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생명에 대한 폭력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민족 간의, 그리고 사회 계층 간의 불의한 자원 분배 때문에 가난, 영양실조, 기아로 내몰리고 있습니다”(10항)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특히 교황님은 ‘무분별한 생태계 균형 파괴’를 지적하시며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들의 방대한 목록을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10항)라고 우려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만연한 분노와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오늘날 다시 우리들의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것은 복음이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따르고, 선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생명의 복음을 따르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보존은 건전한 환경에서 비롯합니다.
글 _ 이용훈 주교 (마티아, 천주교 수원교구장)
1979년 3월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1988년 로마 라테라노 대학교 성 알폰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