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안 그러랴.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이 지옥일 때 있다. 그냥 마음이 어둡고, 구겨질 대로 구겨져 더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냥 그 자리에 무릎 꿇고만 싶을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원망스럽기도 할 때 말이다.
그런 때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냥 그 자리에 멍하니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까? 그런 마음 상태를 밀치고 밖으로 튀어나와야 할까? 나더러 물으면 단연코 후자다. 그것은 또 많은 분들이 그렇다고 고개 끄덕여 동의해줄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언젠가,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한 엄마가 자기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감사의 항목들을 날마다 적어보았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이건 보통의 일이 아니고 보통의 노력이 아니다. 어찌 장애인을 둔 엄마에게 감사의 항목이 있었을까!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 엄마는 그렇게 했다. 왜 그랬을까? 모르면 몰라도 그 엄마는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대목에 와서 우리는 눈물겨운 공감과 만나게 된다. 우리 또한 가끔은 그런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깥 일정이 없는 날, 풀꽃문학관에 머물 때가 있다. 가끔 정다운 손님이 찾아오면 그 손님을 맞아 나는 큰방에 있는 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들려준다. 졸렬한 솜씨다. 노래라 해도 오래 묵은 동요이거나 가곡 몇 가지다. 그렇게 노래 부르면서 나는 느끼곤 한다.
시작과 의도는 손님을 위해서였지만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내가 더욱 좋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 말이다. 우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점점 편안해지기도 한다. 어둑한 마음이 조금씩 밝아옴을 느낀다. 손님을 위해서 한 일인데 그 혜택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반전이다. 남을 위해서 한 일이 나를 위한 일이 되었다는 것. 모름지기 우리는 나만 마음이 어둡고 답답하다고 한탄하면서 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 일이다. 비록 현실이 어둡고 비극적이라 해도 거기서 머물지 않고 더욱 좋은 날, 아름다운 일, 밝은 내일을 꿈꾸며 살 일이다.
여기서 윤동주 선생의 동시를 떠올린다. 그 엄혹하고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윤동주 선생의 동시는 지극히 밝고 희망적이었으며 명랑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삶의 현실이 어둡다 해서 거기서 주저앉을 일이 아니다. 힘차게 일어나 더욱 좋은 날을 꿈꾸어야 할 일이다.
글 _ 나태주 (시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하여 현재 공주에 거주하고 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첫 시집 「대숲 아래서」 이후 문학 서적 100여권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