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요한 20, 1)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첫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이른 첫날, 아직 새벽빛이 등장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묻혀있는 무덤으로 갑니다. 거기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입구를 막았던 커다란 돌이 치워진 무덤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돌아가 자신이 이해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파묘(破墓)’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 2)
무덤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공포의 장소입니다. 죽음만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여기에 마치 드러나거나 알려지면 안 되는 것들이 있는 지, 사람들은 무덤의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아놓았습니다. 철저하게 틀어막아 놓으며 예수님 죽음의 진실을 가두어놓습니다. 무엄하게 로마제국이 아닌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나라를 말하던 예수님이 기억에서 지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무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무덤을 막았던 돌입구가 치워지며 시작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밀기도 힘든 입구의 돌이 치워지며 부활은 시작됩니다. 무덤이 열렸습니다. 이제 무덤은 파괴되었습니다. 죽음이 가득했던 무덤은 부활의 장소, 생명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무덤 입구가 열리며 사람들은 무덤에 감추어 있던 참된 진실,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틀어막고 감추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무덤이 열린 것을 파묘(破墓)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이제 무덤에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덤의 돌문을 치워야 합니다. 죽음의 공간이 아닌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어놓아야 합니다. 무덤에 감추어져 있던 진리를 알리기 위해 뛰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돌을 힘껏 밀어야 합니다. 세상은 무덤을 만들며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말입니다.
논쟁과 타협이 사라지고 혐오와 복수심의 패싸움만 남은 정치, 국가 소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저출산, 온 인류를 멸종으로 이끌고 있는 기후위기, ‘입틀막’으로 표현되는 독선과 오만의 권력, 평화를 파괴하는 각종 전쟁과 테러 등 이천여 년 전 무덤은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는 일은 이제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 손과 발로 무덤을 부활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활을 단순히 전례만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사제의 눈] 제목은 <무덤의 돌이 치워지며 시작된 부활>입니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을 치워, 세상에 부활을 가져오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부활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