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롬반 사제 13명에 대한 교구민 기억과 회상 책으로 엮어
일제강점기인 1934년 4월 1일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아일랜드 선교사 4명이 제주에 당도했다. 이를 계기로 약 65명의 선교 사제가 오늘날까지 제주를 거쳐 갔다. 저마다 신자들 곁에서 일제의 억압에 대항했고, 한국전쟁 한복판에서 고락을 함께했다. 먼 이국땅에서 온 사제들의 흔적은 여전히 제주 곳곳에 남아있다. 제주교구가 3월 1일 발행한 서적 「제주 복음화의 사도들」(제주교구 발행/글쓴이 박재형)에 골롬반 선교사제들에 대한 제주 신자들의 기억과 회상이 담겼다.
“나는 하도 장난이 심해서 엉덩이를 맞으며 교리를 배웠어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중학교를 못 가게 되자 신부님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담배를 줄여가며 당시 15원이던 학비를 모아 주셨죠.”(「변방선교」 1993년 여름호)
서귀포본당 교우 고순지(콘첸샤)씨는 주임이었던 나 토마스(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신부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 신부는 손 파트리치오(패트릭 도슨)·서 아오스딩(어거스틴 스위니) 신부와 함께 외국인 사제 가운데 유일하게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제들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적성국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새벽마다 끌려가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초주검이 되어 본당으로 돌아오던 나 신부는 그럼에도 교우들에게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있다”며 광복에 대한 희망을 심었다.
“신부님, 이젠 그 옷 버리고 새 옷 삽서!” 팔꿈치와 소매, 무릎이 닳아 천 조각을 덧대 입던 원요한(세비지) 신부는 신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신에겐 인색해도 신자들의 병원비나 약값을 낼 때는 서슴지 않았더랬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최초로 도입한 것도 그다. 원 신부는 주일 미사가 끝나면 강론 내용을 찢어버리곤 했다. 이를 말리던 한 교우에게 원 신부는 “강론은 항상 새로워야 한다. 사제가 강론 준비에 게을러지면 안 되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돼지 신부’라 불리는 임피제(맥글린치) 신부는 오늘까지 신자들이 사랑하는 성이시돌목장의 설립자다. 그는 곗돈이 깨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자와, 돈을 벌기 위해 육지에 갔다가 실수로 물탱크에 빠져 죽은 신자를 보고선 신심을 길러주는 일도 시급하지만, 그들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외에도 초대 제주지목구장 현 하롤드(헨리) 대주교와 신창성당을 짓기 위해 스스로를 ‘공사판 신부’라 칭하며 직접 손수레를 끌었던 설요한(러셀) 신부 등 제주에서 사목한 65명 골롬반 선교사제 가운데 13명의 삶이 책 한 권에 실렸다.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는 발간사에서 “골롬반 선교사제들의 희생과 헌신은 우리에게 작은 씨앗에서 시작해 풍성한 열매로 가득한 나무로 성장한 제주교구를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교구는 책을 교구 내 성당과 지역 도서관에 비치했다. 책은 비매품.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