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어느 날, 집 안에서 갑자기 ‘아~!’하며 아픔을 꾹 참아내는 신음이 들렸습니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남편이 머리 쪽으로 들어 올린 팔을 붙잡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라고 묻자 남편은 팔을 움켜잡고 “내리려고 하면 통증이 너무 심해”라며 아픔을 호소하였습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알아보니 ‘목 디스크’라고 했습니다.
치료 방법을 찾아보니 ‘목 디스크는 수술해야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목 디스크 수술 일인자’ 의사 선생님이 계시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디스크 수술은 어려운 수술”이라며 “목 뒤쪽으로 지나가는 척수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정밀하게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6시간 대수술을 받고 나온 남편은 마취가 풀리자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좋았지만, 5년 이내 재발할 수도 있으니 이를 막으려면 공기 좋은 곳에서 생활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때마침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 영종도 파견 근무 신청을 받는다고 해서 자원하라고 했습니다. 영종도는 그 당시에도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로 확정돼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도시보다는 공기도 맑고 한적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남편과 세 딸은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로 이사했습니다.
영종본당으로 교적을 옮긴 우리 가족은 앞으로 다닐 운서공소를 안내받았습니다. 운서공소는 영종성당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평신도 선교사 1명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평일 미사는 공소예절로 대신했고, 주일 미사만 신부님이 오셔서 집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영종도 생활이 익숙해져 갈 무렵, 성당에서 어린이를 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본당 수녀님이 권하셔서 저도 세 딸을 데리고 참여했습니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나도 저 아이들 속에 들어가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수녀님이 다가와서 “자매님 딸들이 다 컸네요?”라고 하길래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수녀님의 한마디에 ‘아이들이 다 컸으니 이제 걱정 없이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할 수 있겠네요?’라는 뜻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렇게 색다른 부르심으로, 저는 매주 주일학교 학생들을 만나는 아주 특별한 봉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주님이 주일학교 교리교사로 부르신 것이 실은 두 번째였습니다. 첫 부르심은 몇 년 전 계산동성당에 다닐 때였습니다. 수녀님이 전화를 걸어 교리교사를 해달라고 부탁하셨지만,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르심을 거절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불러 주셨구나!’ 이 생각이 든 저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고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계산동본당 교리교사에게 부탁해 자료와 자문을 받았고, 인천교구 청소년 사목국도 들러 교리교육 방법과 자료 등 궁금한 것을 물어봤습니다. 다른 교구 교리교육 자료를 찾아 신나게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준비하다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박모란 클라라, 인천교구 박촌동본당 27년차 교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