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가 막을 내렸다. 국민을 대표해 국가의 정책과 방향을 결정하는 이들을 선발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차대한 일이므로, 그만큼 선거의 공정성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무 민감한 나머지 참사에 대한 추모마저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쟁에 이용될 수 있기에, 선거를 앞두고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높은 자리에서 많은 이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이와 같은 중립에 대한 무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올 터다. 물론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304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가 어언 10년이 됐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러 가기 전 스스로 다짐했던 것 또한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중립을 지키자는 마음가짐이었다. 그것이 ‘좋은 언론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다짐과는 다르게, 막상 마주한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저 다가오는 사랑하는 이의 기일을 떠올리며 슬퍼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오송 지하차도 사건이든 이태원 참사든 천안함 사건이든 아픔을 겪는 모든 이와 손을 잡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대할 겁니다.”
이러한 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방한 당시 남긴 중요한 메시지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사는 시야를 가린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추모하는 이유는 생각만큼 복잡하고 정쟁적이지도 않다.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저 위로를 건네는 것. 그런데 왜 우리는 중립이라는 또 하나의 가치관을 들이밀까. 어쩌면 스스로 중립적이지 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웃의 아픔을 그 어떤 걸림돌 없이 마음껏 추모하고 슬퍼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