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현기영 작가가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제주 4·3을 알지 못했다. 현 작가는 소설을 출간한 뒤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독재 시절에 이 책은 금서가 되었다.
나라가 민주화되자 대통령이 국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고 4월 3일은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제주의 4·3 평화공원에 가 보면 희생자의 규모와 비극의 강도에 전율하고 유족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극단적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정권이 바뀌자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려 한다.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이루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4·3 유적지 가운데 애월읍 하귀리의 ‘영모원’은 특별한 곳이다. 주민들은 마을 출신 항일운동가와 4·3 희생자, 4·3 및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군인과 경찰을 모두 영모원에 모셔 추모하고 있다. 지난해 평화 순례를 하면서 이곳에 들렀을 때, 화해를 위해 진력해 온 고창선 선생(1935년생)의 증언을 들었다.
4·3의 광풍이 지나간 이후로 하귀 마을은 갈라졌고 고통과 원한에 응어리진 마음으로 수십 년을 살았다. 사정이 비슷한 마을이 제주와 전국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여기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들의 생각이 비석에 담겨 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6·25의 아픔이 한반도에 닥치기도 전에 이 죄 없는 땅 죄 없는 백성들 위에 아직도 정체 모를 먹구름 일어나서 그 수많은 목숨들이 지금도 무심한 저 산과 들과 바다 위에 뿌려졌으니, 어느 죽음인들 무참하지 않았겠으며 어느 혼백인들 원통하지 않았으랴. 단지 살아있는 죄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마음들은 또 어떠했으랴.”
비석을 세운 이들은 수많은 무고한 죽음과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기억하면서도 “오래고 아픈 생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고”,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면서 화해를 시도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하귀리 분들은 슬픔과 아픔이 너무 크고 깊어서 용서와 화해 없이는 그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정의를 세우려는 시도만으로는 해결도 치유도 될 수 없다고 믿었을까? 제주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비석 앞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