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리석 안에 있는 천사를 보았고, 천사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아 냈다.”
다비드상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신앙고백이다. 그는 이미 대리석 안에 있는 천사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조각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들어있는 천사를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다.
신앙은 곧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발견하고 믿는 것이다. 신앙은 성스러운 절대자를 믿고 절대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내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신뢰와 순종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신앙이란 하느님과 그분이 보이신 계시에 대한 인간의 긍정적인 반응 즉,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느님의 증거와 언약에 의존한다. 즉 신앙은 하느님의 언약인 ‘말씀’에 전 존재를 걸고 신뢰하는 것이다.
신앙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다. 하느님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재림과 최후 심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끝’이 아니라 한 방식의 삶이 끝나고 다른 방식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삶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신앙으로 영생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마르 16,4) 성경은 이 짧은 한 문장으로 무덤 안과 무덤 밖을 연결한다. 참으로 놀랍고 엄청난 변화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그렇게 성경은 단호하고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다. 무덤 안의 어둠과 두려움이 무덤 밖의 빛과 희망으로 연결된 것이다. 무덤 안의 죽음과 무덤 밖의 생명이 연결됐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돌이 치워진 것이다.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은 치워졌고, 창으로 찔려 벌어진 그 옆구리 사이가 보고 믿은 이의 손으로 메워졌다. 그리고 믿지 못한 토마스는 벌어진 상처를 넣어 보고 나서야 신앙고백을 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통해 열어 주신 생명의 문, 그분께서 당신을 믿고 당신의 뜻을 끝까지 충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을 하늘의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해 열어 주신 천국의 문,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발걸음이 우리 신앙의 전부일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그 생생한 기억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펼치신 구원의 손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고립과 절망으로부터 꺼내 주며, 지금 우리 안에 희망의 기쁨을 움트게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양팔을 벌려 신앙으로 다져진 우리를 맞이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은 성령이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을 받아 부활의 신앙으로 각자에게 내려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작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신앙인의 진정한 삶이 아닐까.
글 _ 윤여환 요한 사도(충남대 회화과 명예교수)